같은 말씀으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열왕기상 21장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신앙생활은 전쟁입니다. 전쟁이라는 말은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처럼 이 싸움을 이기고 천국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적의 정체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마귀와 귀신들을 가소롭게 여깁니다. 하지만 마귀는 사람보다 훨씬 더 강하고 영리하며 경험도 풍부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악한 영을 대적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깨뜨리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정말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 악한 영들은 부끄러움이나 양심 같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까지 전혀 부끄러움 없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세벨이 나봇을 죽일 때 사용하는 방법은 율법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세벨은 알고 그랬지만 성도가 말씀을 잘못 알면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려고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도 살아서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은혜를 받을 기회라는 뜻입니다.
다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쓰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정말 성령님께서 사람의 입술을 통해 말씀을 주시면 사람의 마음에는 큰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과 불순종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귀를 막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순종을 선택해서 초대교회의 첫 성도들이 되었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불순종을 선택해서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해서 죽인 마귀의 흉기들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되는 설교는 무조건 율법적인 설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주일간 힘들게 일하고 교회에 나왔는데 마음에 위로는 못 줄 망정 오히려 힘들게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병원에 왔는데 의사가 건강하다는 말은 못해줄 망정 병이 들었다고 진단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병을 고치려고 더 의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그래서 환자들은 돈을 들여가며 쓴약을 먹고 주사를 맞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입맛이 없어지는데도 방사선을 쬐고 항암제를 먹습니다. 심지어 자기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면서도 돈을 냅니다. 살 소망 하나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살 소망, 천국 갈 소망을 가지고 들으면 부담스러운 말씀일수록 더 큰 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너무나 두렵고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라는 축복이 보입니다.
이처럼 책망의 두려운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이것이 마귀가 말씀으로 사람의 영혼을 죽이려는 궤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날마다 선포하고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정죄하고 포기하게 하려고 주는 말씀이라도 그 뒤에서 소망을 발견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릴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주님의 교회를 박해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겸손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그런 그들을 용서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부르신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 짙을 때 믿음으로 더 큰 소망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론적으로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경험해 보았다고 그것이 오늘도 똑같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어지간한 교회들은 다 디지털 믹서라는 것을 씁니다. 모든 음향상태를 새벽예배, 수요예배, 주일예배 등으로 따로 저장해 놓고 상황에 맞추어 불러내어 사용합니다. 그러니 물리적인 수치로는 소리가 항상 같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날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몸의 컨디션이 다르니 청력이 달라집니다. 청력이 달라지니 똑같은 소리도 다르게 들립니다. 그래서 뒤에서 음향을 조종하시는 분들은 날마다 성도들에게 불평의 소리를 듣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자기 귀에는 소리가 다르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들의 귀가 날마다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어떤 때는 소망으로 들리고 어떤 때는 절망으로 들립니다. 어제는 분명히 그 말씀을 듣고 일어섰는데 오늘은 그 말씀 때문에 넘어집니다.
왜일까요? 하나님도 살아계시고 마귀도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넘어지는 것 같아도 말씀을 붙잡고 아멘하며 순종하면 반드시 일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마귀 중에 사람이 가장 연약하지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마귀는 사람보다 강한 것 같지만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깨어있어 마귀의 궤계를 알고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말씀이 부딪히는 것인 은혜인 줄 알고 살기 위해 말씀을 순종하게 하소서
2. 말씀에 내 기분이나 욕심을 섞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