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위에만 은혜를 부어주신다
이사야 6장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 본문은 교회생활을 많이 한 사람은 수십 번 읽고 들었을 말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번에 읽으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기는 입술이 부정하고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부정한 자인데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다고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드디어 자기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황홀경에 빠지는 사람, 그리고 이제 사람들에게 자랑할 꿈에 부푸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아마 그 차이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성도를 기뻐하시고 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사람의 겸손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자기를 낮추신 것이지만 사람의 겸손은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굿간에 태어나실 이유는 더 없었습니다. 가난하게 사실 이유, 멸시와 천대 받으실 이유, 채찍에 온 몸이 찢기시고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실 이유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겸손이었습니다.
우리는 마굿간보다 더한 곳에 태어나도 할 말 없는 죄인입니다. 가난, 멸시 천대는 물론이고 영원한 형벌이 가장 합당한 죄인들입니다. 사람이 이것을 제대로 알면 겸손하게 됩니다. 자신을 알면 그에 합당한 처신이 나오게 되고 그 합당한 처신에 합당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왜 세상의 모든 것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까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만물의 이치를 통해서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겸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하나님 앞에서 입술이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교대상은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더러운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선다고 이사야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자기 입술이 부정하다고 한 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더럽고 마음과 입술이 부정한지 알았기에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황홀경에 빠지는 대신 자기가 망하게 되었다고 부르짖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사야가 그렇게 자기의 더러움을 한탄하자 천사 중의 하나가 제단의 숯불을 그의 입에 대어 그 입을 정하게 한 것입니다. 천사가 알아서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은 자기의 처지를 잘 알았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그 땅에 단 한 명 뿐인 입술이 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겸손한 자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많은 사람이 이런 일을 만나게 되면 자기 도취에 빠집니다. 실제로 사람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사단이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고 나타나는 일이 많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런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으로 인해 시작됩니다. 또 이단이 아니어도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주님께서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신비한 체험을 했을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 주신 것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너무 쉽습니다. 그 일 이후의 그 사람을 보면 됩니다.
정말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라면 이사야와 같이 겸손하게 자기를 더 낮추며 바울과 같이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삶은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러면서 더 겸손해지는 믿음의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맺을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은사가 희귀한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항상 자기를 낮춥시다. 우리에게는 멸시와 푸대접이 어울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낮아질 때만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의 잔재들이 없어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그 위에 제단 숯불로 그 입을 정결하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셔서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리게 하소서
-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죄인의 교만을 버리고 오직 낮은 곳을 찾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