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9장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행실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온 죄악된 생활이 너무나 익숙해서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을 양심이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10장 22절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뿌림도 오늘 본문과 마찬가지로 ‘피 뿌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마비되어 그 결과 모든 행실이 죽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생각이 악하고, 생각이 악하니 말과 행실이 악했던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그 악한 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 양심의 감각이 살아나고 양심이 회복되면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 3장 9절에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데 왜 우리 삶은 온전히 선하지 않은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서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런 괴로움이 없었는데 지금은 마음에서 올라오는 악한 생각에도 괴롭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한 양심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에 그 피가 뿌려졌다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짓던 죄들이 있습니다. 술 많이 마시고 취하는 것, 상스러운 욕을 하는 것을 남자답다고 생각했고, 음란한 농담 잘 하는 것을 유머가 풍부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차마 행동으로 할 수는 없어서 마음으로 즐기던 죄들이 있습니다. 음란한 상상, 미워하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상상, 모든 사람을 누르고 홀로 높아지는 그런 상상들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거룩함과 정결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부터는 말과 행실은 고사하고 생각을 하는 것도 마음이 찔리고 괴로워집니다. 주위의 친구들은 너무 오버한다고 세상 말로 밥맛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만 그들의 조롱보다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보실지가 더 괴롭습니다. 이것이 피뿌림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괴로운데도 그 죄들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수시로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귀의 속삭임을 조심하십시오. “완전한 거룩은 불가능해. 그저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만 하지마. 그 정도도 대단한 거야”
 
마귀의 속임수의 무서운 점은 90퍼센트의 진리에 10퍼센트의 거짓말을 섞는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완전한 거룩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한 것을 주님의 공로가 채워줄 것입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하는데 까지 하고 나머지를 주님의 공로가 메꾸어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로가 아니면 거룩을 꿈도 꿀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영원한 불지옥에 어울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옛모습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 죄를 보혈로 씻으시고 우리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새로 시작한 삶도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옛사람의 죄성 때문에 계속해서 실패와 절망을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악한 상태에서 벗어난 양심이 계속해서 우리를 찌르고 우리는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또 주님의 보혈의 샘으로 나갑니다. 그 마음이 진실할 때 그 피가 다시 우리를 깨끗하게 씻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전진하며 은혜로 마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죄를 짓는 것을 그냥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죄가 편해지면 다시 양심이 악해지는 것입니다.
 
양심이 악해지면 죄와 죄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구별이 안 되면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방이 더럽다고 느끼지 않은데 청소를 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 나가지 않습니다. 보혈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보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죄에 지더라도 주님을 붙잡고 회개하여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지만, 이렇게 주님을 멀리하다가 떠나게 되는 사람은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괜찮은 것은 사실이지만 회개할 길이 있기 때문에 괜찮은 것입니다. 죄 자체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면 회개할 길이 없기 때문에 안 괜찮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뿌림의 은혜로 양심이 깨끗해져 구원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양심이 다시 무디어 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양심이 살아있는 만큼 더 거룩해지려고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19세기말 설교의 황제로 불렸던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통곡을 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본 사모님이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주님을 생각해도 마음에 감동이 없고 눈물이 흐르지 않소. 혹시 내 양심이 죽은 것이 아닌지 너무 두려워서 통곡하고 있소”
 
우리 양심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피가 우리 마음에 뿌려져 마르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런 죄인을 용서하신 그 사랑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런 성도로 끝까지 남아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 마음에 그 피가 뿌려져 살아 있는 양심으로 회개하게 하소서
2.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피 흘리신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성도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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