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너의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
아들은 신앙서적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더니 내일 제출할 독후감은 안 쓰고 계속 울기만 하고 있다. 너무 감동해서 그런가? 아니면 글도 쓰기 싫을 정도로 속상한 일이 생겼는가?
나는 아들의 심중을 알아보기 위해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데?” 하며 책 표지를 보고는 내심 안심했다. 왜냐하면 그 책은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그린 ‘사랑이 원자탄’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난 아들은 책상 앞에 이렇게 써 붙였다.
“그 사람이 너의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
아들은 아마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두 아들을 무참히 총살한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은 것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책에서의 감동이 며칠이나 갈까 하며 나는 그 섬쩍지근한 글귀를 떼어버렸다.
그랬더니 아들은 한술 더 뜬다. 혹시 자신이 다른 사람의 권모술수에 모함을 받아 너무 억울해서 가슴을 치며 분노하고 있거든 “그 사람이 너의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라고 크게 소리내어 외쳐 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집의 표어가 되다시피 했다. 우리는 식구 중 한 사람이 화가 나고 억울해하고 있으면 얼른 그 잣대를 갖다가 대어 준다. 그러면 그 잣대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한다.
나에게 아무리 잘못하는 사람이라 한들 “그 사람이 너의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에 대입하면 거기에 걸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히려 나의 옹졸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독후감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그 말을 읊조리면 용서 못할 사람이 없고 더 이상 화나고 속상할 일이 없다. 나는 떼어냈던 아들의 명작품인 독후감을 다시 크게 써서 벽에 붙였다.
“그 사람이 너의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
“맞아요. 그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억울하게 하긴 했어도 두 아들을 죽일 정도의 원수는 아니에요.”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내 삶에서 이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때마다 이 말을 소리내어 스스로 물어본다.
“그 사람이 너의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
이 말은 그 사람이 아무리 나를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해도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용서해야 하는 아주 작은 잘못이고 아주 작은 허물임을 금방 알게 해준다.
유정옥 사모님의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중에서
2021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서로 사랑하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듣기에 가장 흔한 말이지만 실제로 보기는 가장 어려운 말입니다.
아시는대로 사랑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미움입니다. 미움이 공격할 때마다 “그 사람이 네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를 마음에 물으며 이기고 사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참 사랑의 향기가 교회 안에 가득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2021년이 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