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은 기도를 강화시킨다
금식은 믿는 자가 자기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고린도전서 9:27」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 몸은 신체 기관과 육체의 정욕 때문에 종 노릇은 잘하지만, 상전 역할은 할 줄 모른다. 따라서 항상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언젠가 어떤 목회자가 이것을 잘 표현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위가 언제 식사하라고 내게 지시하지 않고, 내가 언제 식사할지 위에게 지시한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목적으로 금식을 할 때마다, 그는 자기 육신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한다.
“너는 상전이 아니고 종이라는 것을 명심해.”
「갈라디아서 5:17」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과 인간의 육체의 본성 사이의 대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7)
금식은 인간의 육적 본성에서, 성령을 방해하는 두 가지 큰 장벽을 다룬다. 그것은 혼의 고집스러운 자기 의지와 육의 끈질긴 자기 욕망 추구이다. 금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혼과 육을 다 성령께 복종시켜야 한다.
금식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이므로 전능하시며 불변하시다. 금식은 성령님의 전능하심을 가로막는 인간의 육체적 본성에 있는 장애물을 깨부순다.
이런 장애물이 제거되고 나면,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충만한 권능으로 온전하게 사역 하실 수 있다.
「에베소서 3:20」에서 사도 바울은 기도의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은 성령님이시다. 금식은 우리의 육체적 장벽을 제거함으로써, 성령의 전능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실천할 길을 연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는 단 한 가지 제한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로우심이다. 금식이 절대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바꾸지는 못한다. 만약 무언가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금식을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만들 수는 없다.
만약 어떤 것이 그릇되고 부도덕한 일이라면, 사람이 아무리 오래 금식을 해도 그것은 변함없이 그릇되고 부도덕한 일인 것이다.
사무엘하 12장에 한 가지 사례가 있다. 다윗이 간음하여 그 부도덕한 관계로부터 아이가 태어났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심판으로 그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이가 심하게 앓자 다윗은 7일간 금식했다. 하지만 아이는 죽고 말았다.
7일간의 금식이 다윗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잘못된 일이라면, 아무리 금식을 한 다 해도 그 일을 옳은 것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금식은 속임수도 아니고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당신의 백성들이 온전한 삶(total well-being)을 누리도록 삶의 영적, 육적, 물적인 모든 영역에서 채우시는 분이다.
금식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다른 어떠한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역으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어떠한 다른 것도 금식을 대신할 수 없다.
「골로새서 4:12」에서 우리는 에바브라가 믿는 동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높은 기준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러한 높은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한 가지 성경적 방법이 바로 금식이다.
데릭 프린스의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와 금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