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란 무엇일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산상 설교’ 중에서)
하나님은 긍휼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긍휼을 어떻게 해석하든 이 말은 이상의 모든 사실들 곧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해야 합니다.
긍휼과 진리는 서로 조화됩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진리와 율법을 희생시켜야만 긍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긍휼은 참된 긍휼이 아니며 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긍휼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긍휼을 은혜와 비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와 긍휼 사이에는 흥미 있는 특징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본 것 중에 이 두 용어에 대한 최상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은혜는 죄를 지은 사람들과 특별히 관련되고,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특별히 관련된다.”
다른 말로 은혜가 죄를 전체로서 내려다 보는 반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 보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측은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소원이 합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측은감과 행동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측은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의 비참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것을 제거하려는 열정으로 유도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잘못했을 때, “자 나는 이 점에서 내 권리를 행사해야 하겠다. 이 사람이 내게 죄를 범했으니 잘됐다. 마침내 기회가 오지 않았는가.” 라고 말하는 것은 긍휼과 정반대입니다.
여러분은 복수의 영을 품과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 중에 있는 여러분의 원수들에 대하여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영이나 친절한 영을 품고 있습니까?
자비나 긍휼에 대한 완벽하고 으뜸가는 실례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련한 상태를 보셨고 고통을 보셨으며, 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신 것은 긍휼 때문입니다.
공의와 긍휼 사이, 혹은 긍휼과 진리 사이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둘은 서로 조화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이것을 매우 명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즉 그의 아들의 탄생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그는 마침내 조상들에게 약속된 긍휼이 도래햏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 이것을 알았습니다. 죄의 결과로 가련한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과 행동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산상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