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이 다윗을 꾸짖지 않았다면
지난주 저는 나단 선지자가 범죄한 다윗을 책망하는 내용의 말씀을 거듭해 읽었는데 성령께서 제게 선지자 나단과 함께 다윗의 방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 수 시간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설교 준비가 잘 되어 가는가 물었을 때 저는 “막힌 것이 안 열린다.”고 했습니다. 본문이 열리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붙잡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묵상을 내려놓고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제가 죄를 지으면, 제게도 다윗에게 보낸 것 같이 선지자를 보내셔서 저의 죄를 드러내 주십시오. 주님, 제게도 다윗에게 주신 그런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는 선지 자를 보낸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 중 가장 큰 것이 선지자를 보낸 것입니다.
오, 주님, 제가 타협하고 있으면 선지자의 설교를 듣게 해주십시오. 죄를 책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설교자를 보내 주십시오.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일으켜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야 네가 알아듣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본문 말씀의 중요 한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강대상에 서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설교 때문에 재정에 손해가 올까봐 계산하지 않는 설교자입니다.
부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50년 동안 그들을 경책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에게 경고를 하며 장로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설교자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했던 나단 선지자가 애통함으로 죄를 지적할 때 성령의 회개의 영이 내렸습니다.
나단처럼 회중의 죄를 눈감아주지 않는 공정한 설교자들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거룩함과 불경한 것을 분별하며, 사람들의 문제에서 죄악을 보는 설교자 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는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에 타임 스퀘어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왜 안 다니게 되셨나요?” “부정적인 것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요.” “좀 더 긍정적인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부정적이세요.” “저는 목사님의 메시지를 감당 할 수 없습니다. 불안했어요.” 그는 계속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뉴욕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말하는 교회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런 의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에 죄가 있다면, 그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여자분은 “목사님의 서간 설교를 읽는 게 두려워요, 언제나 저를 불편하게 만들거든요. 목사님은 메시지를 조금 부드럽게 전하셔야 합니다. 저는 당신처럼 강대상에서 영혼의 죄를 밝히 드러내는 그런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하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를 찾으시고 죄를 찢으시는 역사에 대해 감사합니다. 나단이 다윗의 사악함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면 다윗의 종말이 어떠했습니까?
나단이 다윗을 두려워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나단은 왕인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단이 사실을 말하면 다윗이 분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생명을 걸고 진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저는 나단이 그렇게 잘해 주어서 기쁩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의 친구로, 여러분과 적당히 맞춰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환영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진리를 전했고, 여러분이 그 진리에 의해 변화되었기를 원합니다. 책망을 듣고자 하지 않는 다윗들에게, 그리고 교회들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 말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의 강한 책망을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죄를 짓고 있는데, 그 죄에 대해 책망하는 설교를 한다면, 그 설교는 진정한 은혜의 설교입니다. 여러분이 지옥길로 가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심판을 받을 처지였습니다. 다윗은 몇 년 동안 그 죄를 합리화 시키며, 조금씩 안일해 졌습니다. 아무도 다윗의 죄를 경책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각성이 없고, 죄에 대한 애통도 없고, 회개가 없으면 마음이 강퍅하게 됩니다. 세상 어떤 곳보다 교회 안은, 마음이 강퍅하게 되기가 가장 쉬운 곳입니다. 복음 안에 살면서 그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됩니다.
최악의 심판은 죄를 짓고 있는데 성령이 책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음하고, 훔치고, 살인하면서 그 모든 것을 합리화 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불, 그 갈망, 성령을 향한 굶주림이 이제는 없고 중심 없이 방황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책망의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타협하며, 안일했습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함이라.”
타협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은 회개의 애통함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슴을 찢는 사도 바울의 글에 성령의 역사하는 책망이 없었다면, 회개의 애통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의 죄를 강하게 꾸짖고,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눈물로 너희를 책망하는 것은 화가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희를 돌보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는 아주 강하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며, 우리를 무너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교인을 사랑하는 목회자라면 이런 책망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