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저는 요즘 참 마음이 괴롭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신앙의 양심과 실제 삶의 거리가 넓어지는 느낌 때문입니다. 또 삶에 있어서 의도하지 않은 실수들, 하지만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제 인격의 문제인 것들을 더 잘 알게 되면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일들을 직분의 무게를 통해 알게 되면서 더 괴로움이 큽니다. “내가 목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살았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앞으로 남은 날들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제 신앙과 인격은 이런 괴로움을 지날 때 한 단계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괴로워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데 아무 걱정이 없고,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은 착각이지 않겠습니까? 혹시 사람에게 입에 발린 좋은 말을 듣는다고 해도 저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평가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긍정에 대한 강의를 하고 책을 쓴 정신과 의사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긍정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데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라 왜곡이죠. 심지어 현재 상황이 나쁜데 좋다고 생각하면 왜곡을 넘어서 망상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죄인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다는 것이 우리는 여전히 더러운 죄인이어도 괜찮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상태를 고아와 같은 상태였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 고아가 잃었던 부모를 다시 만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부터 부모가 있는 사람의 삶을 새로 배워야 합니다.
중국의 어떤 부모가 네 살 배기 아들을 잃었다가 14년 만에 찾았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유괴되어서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팔려 그들의 자식으로 14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 사실을 안 후에도 친부모와 살기를 거부하고 양부모와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가 친부모에게로 가면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은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고, 엄밀하게 따지면 양부모는 유괴된 아이를 돈 주고 산 인신매매범이지만 지난 14년을 함께 했던 그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은 것이지요.
그러니 고아에게 부모가 생기는 것은 얼마나 더 낯선 일이겠습니까? 부모라는 것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으니 거기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물며 부모를 공경하는 법, 그 가정의 가풍 같은 것을 배우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과정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것이 이와 같은 일입니다. 배울 것이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것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이 바로 징계입니다. 사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제 나이의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인격을 고치기에는 남은 삶이 너무 짧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자기를 받아들이고 편하게 삽니다. 그렇다고 제가 날마다 저의 악한 모습들을 새로 발견하고 괴로워 하는 것이 불행한 일일까요?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영원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사전적인 뜻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괴로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괴롭습니다. 아니 괴로워야 합니다. 괴로운 것을 괴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아까 정신과 의사가 한 말처럼 왜곡이고 망상입니다.
하나님 품 안에 거하는 일은 그저 기쁘고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더러운 사람이 깨끗한 사람과 같이 살면 깨끗한 사람만 힘드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사람도 힘드는 것처럼, 죄인이었던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품에 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사전적 의미의 긍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고난인가! 더럽게 살다가 더럽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며 살게 되었구나!” 라고 외치며 그 고통의 시간을 감사하게 지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셨어도 이렇게 날마다 징계하시지 않는다면 결국 오물 투성이의 예복을 입고 부끄럽게 주님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날마다 우리를 징계하셔서 그 괴로움을 통해 거룩을 향해 나가게 하십니다.
저는 저의 실체를 보는 일이 너무나 괴로워서 여러가지 생각을 합니다. “목사가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었을까?” “박보영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목사라고 생각하며 지낼 수 있었을까?” 대답은 다 “아니다”입니다.
착각과 망상 속에 마음 편하게 살 수는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야 말로 노아의 홍수 바로 전 날 사람들의 모습이고, 소돔과 고모라에 불 비가 내리기 한 시간 전,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의 이야기가 듣기 싫은 것은 더 이상 깨끗해 질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런 저런 모양으로 여전히 징계하셔서 다시 좁은 길을 걷도록 만드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합시다.
세상의 달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디쓴 징계를 귀하게 여깁시다. 달콤한 거짓말로 멸망을 속삭이는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괴롭지만 진실한 말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랑합시다. 그렇게 성도는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따라 좁고 험한 길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세상의 거짓말에 속지 않게 하소서
- 징계의 시간이 당장은 괴로워도 곧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좁은 길을 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