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행실을 산출하려고 기를 쓰는 죄
죄는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활동하며 육신의 행실을 산출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내버려둔 다면 우리도 죄를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가만히 있어 보이는 때에도 사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장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죄가 작용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때조차도 죄에 대항하여 이길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을 뿐아니라, 우리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항상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롬7:23).
또 한 편에선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십니다”(약 4:5). 이러한 싸움은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릅니다”(갈5:17). 정욕은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며 죄를 잉태케 합니다(약 1:14-15). 정욕은 모든 도덕적 행위 안에서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거나,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게 심령을 어지럽힙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이것이 선을 행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같은 원인으로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거나, 아니면 내가 마땅한 바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모든 거룩한 일들이 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7). 그것이 우리 심령의 안정된 틀을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 ‘‘얽매이기 쉬운 죄”(히 12:1)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서 사도는 심각한 고민을 토로합니다(롬 7장). 이처럼 죄는 항상 활동하면서, 악을 잉태하고, 죄악을 행하도록 꼬드기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나는 항상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이나 하나님을 위한 일만 해왔으니 내주하는 죄가 손을 내밀어 내가 한 것을 부패하게 내버려 둔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간에 내주하는 죄의 이러한 수작은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내내 벌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죄가 항상 활동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 죄를 항상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갈피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항 받지 않는 원수들에게 두배로 강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원수에게 정복당하고 말 것입니다. 죄는 교활하여 언제나 틈을 엿보고, 강렬하여 항상 우리 영혼을 죽이는 작업을 줄기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미련하여 죄가 가져올 파멸에 자신을 방임하고 있다면, 대체 어디서 위로 받을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죄가 우리를 뒤엎거나 우리가 죄를 뒤엎거나, 죄가 우리를 이기거나 우리가 죄를 이기거나 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은 항상 이러할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타협을 이루어내고 이 싸움의 전투를 중지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면(그 사람이 순종의 영성과 죄의 교활성에 대해서 익히 잘 아는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그 사람은 내주하는 죄 죽이기의 의무에 관하여 자기 영혼에게 “내 영혼아, 편히 쉬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주하는 죄의 어지럽게 하는 반역적 활동에서 건짐 받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성도들은 부단한 전투 외에는 그 죄를 이기고 안전하게 설 방도가 전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죤 오웬의 ‘죄 죽이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