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순종, 예배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삶입니다. 예배의 회복은 교회 안에서의 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의 예배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절과 3절의 말씀은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세대를 붙들고 있는 사상과 풍조를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의 탈을 쓰고 악한 세상을 섬기게 만드는 모든 행위들을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카톨릭을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카톨릭의 가르침은 그대로 믿으면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 초기 카톨릭은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 때문에 포교가 어려워지자 ‘그 나라에 들어가서 상황에 맞게 변하는 지혜’ 라는 미명 아래 제사를 허용했습니다.
 
그렇다고 개신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세상 풍조와 상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성경을 읽으면서 “설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심한 것을 요구하실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세대의 풍조에 잡혀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옥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은 주님의 고난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사람이 구더기가 된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사람 중에서도 보잘 것 없는 외모, 가난하고 비천한 계급으로 30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지옥의 형벌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그런데 지옥이 없답니다. 불이 난 줄 알고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온몸을 다쳤는데 알고보니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지요. 이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모욕할 수 있을까요?
 
지옥은 생각하기도 싫은 것은 세상 사람들만 아니라 가짜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에 사역자의 탈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신학을 만들어 내고 여러 명이 동조해서 십자가 신앙을 비웃음 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풍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붙잡혀 있는 마음이 새롭게 함을 받지 못하면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은 것처럼 결국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쏟아져 버리게 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보아야 바로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서 색맹이 색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안경이 있습니다. 색맹이신 분들이 처음 그 안경을 끼고 색을 구별하는 영상이 많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게 빨간 색이었어? 보라색이 이런 거였어?”
 
“여지껏 내게는 다 똑같은 칙칙한 색이었어”
 
바로 보기 전까지 그들은 자기들이 색맹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무엇을 구별하지 못하는 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것을 실체로 보았을 때 그들은 색깔의 아름다움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세상 풍조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색맹보다 더 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이유가 눈이 어둡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이 그런 뜻입니다. 이제 눈을 조금 뜬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부분이 세상 풍조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3절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각이 어떤 분량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생각이 선을 넘으면 세상이 탐욕적이고 음란하니 그보다 나으면 되는 줄 착각하고 빠져들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각의 분량은 오직 말씀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명령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예배입니다. 왜 이 세대에서 기독교가 조롱을 당할까요? 삶의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걸리면, 자기 자존심이나 욕심이 걸리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사람들’ 이것이 이 세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내리는 정의(definition)입니다. 좁고 험해도 말씀으로 그어 놓으신 길을 것이 삶의 예배입니다.
 
다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예배를 강조하면서 모이는 예배를 폐하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일 수록 모이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이것도 마귀가 배후조종하는 세상풍조의 영향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모이는 예배가 약해진 것만 보아도 악한 세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주님 뜻대로 사는 삶의 예배와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예배를 균형 있게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균형을 세워 생명의 길 끝까지 걸어가는 진짜 예배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시험과 유혹에 길을 틀지 않고 말씀을 따라 걷는 삶의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2.        모이는 예배가 삶의 예배의 시작이 되는 균형 잡힌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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