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집

마태복음 7장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산상수훈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 산상수훈의 그리스도의 양심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양심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모든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의지하라는 주님의 메세지이다.”

제가 생각해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을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오늘 이 산상수훈의 마지막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나의 이 말”은 산상수훈 전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이 주된 메세지라면 그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과 행하지 않는 사람을 분명히 가르시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모든 생각의 함정은 바로 율법주의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것인데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도 이것을 행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율법의 경우에도 그 말씀을 듣고 진실하게 행하려는 사람들은 설사 율법을 어길 때가 있더라도 자기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설사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다윗 같은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신 것 처럼 산상수훈도 정말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을 쓰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실수하고 넘어져도 주님 앞에 나가서 그 피의 공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능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다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하신 모든 일과 모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중에 다른 것은 대충 넘어가고 보혈의 공로만 의지하는 것은 구원에 합당한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성도는 마땅히 산상수훈의 가르침, 아니 성경전체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힘을 다하라는 주님의 선포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중에서 또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석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 둘 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멀쩡한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에만 오만 개가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전 세계적의 기독교인의 수는 25억명 가량이 된다고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었든 반석 위에 지었든 집을 지은 사람의 수가 이렇게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집은 작은 비바람에도 무너집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교회를 떠난 사람의 수가 전체의 30퍼센트가 넘는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작은 비바람에도 무너지는 집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의 환란이 오면 서있는 집을 찾는 것이 어려울 만큼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믿음을 떠날 것입니다.

왜 이들이 지은 집이 무너질까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하면서 기도를 해도, 능력을 행할 믿음이 있어도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그 집이 무너집니다.

환란의 때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마지막 때의 환란은 이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이 다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누구라도 환란을 이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넘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내가 환란을 이길만한 믿음이 있을지 걱정할 때마다 자기가 얼마나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지를 보면 바로 답이 나오게 될 겁니다.

로케트를 쏘아 올릴 때 그것이 목표한 행성에에 착륙할 수 있는지를 미리 수학적으로 검산을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환란을 이기고 주님나라에 안착할 수 있을지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렇다고 인정하고 회개하면 길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불순종을 가리려고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주님의 말씀 가운데 담긴 소망과 경고의 메세지를 가슴에 밖아 넣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란한 생각과 입을 닫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집을 지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 Articles

순종의 딜레마

삼상 3:15 “사무엘이 …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하나님은 깜짝 놀랄만한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성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인가”하고 의아해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강한 손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곧 섭리를 통하여 강권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만지시는 분은 다름 아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당신은 발생하는 상황을 우연으로 봅니까? 아니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분변합니까?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 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주곡이 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마다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만드십시오.  경책은 징계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즉 경책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잊으셨나요? 누가복음 11:13절이었는지 아니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이었는지 헷갈리나요? 주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의 귀는 예리하여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을 나의 “엘리 제사장”에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이 순~종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지는 부분입니다. 나는 내게 가장 가까운 “엘리 제사장”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엘리에게 말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그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쩌면 당신의 “엘리 제사장”에게 아픔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삶의 고통을 막으려다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방치해물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오른 손을 잘라내지 않고 눈을 뽑으려 하지 않다가 당신의 생명마저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결정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조언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만일 조언을 얻으려 하면 당신은 거의 언제나 사탄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에서

끝없이 지루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더 이상 비전도 없고 소망도 없는 가운데서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전능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비전도 없고 그래서 열정도 전망도 없을 때, 헌신에 있어서, 연구에 있어서, 읽는데 있어서, 주부의 부엌일을 하는데 있어서, 책임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복음을 선포할 때보다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의 근본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육신의 근본이 그들의 살과 피가 활동하는 영역으로 나타나도록 하여야 하고, 그들의 손길을 통해서 성육신의 근본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역자 주 – 챔버스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성육신과 각 개인에게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육신, 곧 거듭남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 간단한 한 구절로 구속과 거듭남을 성육신의 근본에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비전이 없고 활기가 없고 오직 매일 되풀이 되는 지루한 일들만 있을 때 우리는 백기를 흔들어 항복을 표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근본을 적용하는 자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꾸준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짓눌리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언제나 고정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일들이라도 결코 당신을 지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조잡하고 소심한 마음과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십시오

마태복음 7장 낭독

[presto_player id=2849]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은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9장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히브리서 13장9-15

히브리서 13장9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10    우리에게 제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