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15-17
사도행전 9장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주님께서는 바리새인 사울이라는 사람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려고 계획하시면서 하나씩 그의 삶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의 어떤 면을 보셨을까요?
먼저 그의 안에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이겨낼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잡으려 온 유대를 돌아다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성벽의 둘레가 4km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성을 돌아보는 데만 해도 반나절은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온 유대를 다녔습니다.
다른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해도 자기들이 생활권을 제외한 곳은 다니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만 위협하지 않으면 이단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짜 신앙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암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진실한 열심을 하나님께서 보셨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를 일찍 부르시지 않고 교회들을 박해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어차피 누군가의 전도도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초자연적으로 부르셨는데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울의 일생에 걸어 두신 안전장치라고 믿습니다. 성실하고 열심 있는 성도들이 가장 잘 걸려 넘어지는 것이 자기의, 즉 교만인데 바울은 성실과 열심으로 최고인 사람이니 자기도 모르게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는 대로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떠받드는 사역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바울일 만큼 인정받는 사도였습니다. 또 구약과 신약에 통달한 신학자였습니다.
이런 바울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교회를 박해한 자라는 족쇄를 걸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매일 그는 자기의 한 일을 후회하며 고통스러워했겠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고통과 은혜가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죄 때문에, 부족한 인격 때문에 괴로운 것이 있을 줄 믿습니다. 저도 매일 “왜 나는 이것 밖에 안 될까?” 괴롭고 제 자신이 싫은 순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 끝에는 반드시 “이런 나를 오늘도 참으시고 용납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또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이방인들의 견고한 진을 복음으로 무너뜨리는 것과 동족의 위협과 박해라는 큰 고난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먼저 박해하는 자리에 서도록 하셨습니다.
박해하는 사람과 박해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바울만큼 이해한 사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 철저한 바리새인의 삶을 통해서 유대교의 신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장 잘 이해한 사도가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장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순간들도 주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그를 준비시켜 나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바울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대한의 은혜를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최선을 다해서 유익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수억 원짜리 산삼이 있어도 그것을 어떻게 복용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최고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울이 받은 것과 똑같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한 그의 열매와 우리의 열매를 비교할 때 얼마나 면목이 없습니까? 이 것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큰 회개의 역사와 큰 열매를 맺는 순종이 있을 줄 믿습니다.
똑같은 은혜를 받아 맺을 수 있는 최고의 열매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