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 신앙을 버려라
열왕기하 12장 1 예후의 제칠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산당은 이방인들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높은 산에다 우상을 섬기는 집을 짓고 그곳에서 자기들의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방인들의 산당을 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여호수아를 비롯한 가나안 1세대들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헐었던 산당들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산당은 많은 편리한 유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유익은 가까이에 지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모든 이스라엘이 성막 근처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각종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를 지키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흩어져 정착하면서 어떤 지파는 성막이 있는 곳에 가려면 며칠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산당은 자기들이 거주하는 땅 근처 산에다 지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차라리 성막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해서 제사를 못 드리게 되는 것보다 그렇게라도 제사를 드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의 선후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으로 다른 일들을 맞추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나머지 일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사정을 앞세웠습니다. 자기들의 생업이나 생활의 계획을 먼저 정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던 산당이었던 것입니다. 방식은 이방인들의 것이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하나님의 성전처럼 만든 후에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오히려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산당은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법궤를 빼앗기게 되면서 아예 정착을 하게 됩니다. 법궤가 없는 성막은 엔진이 없는 자동차처럼 무의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 때에도 산당이 있었고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곳도 산당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전을 짓고난 후에도 산당을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북왕국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면 다시 유다와 하나가 되어 왕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 해서 산당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성막의 역할을 대신했던 산당은 완전히 변질되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를 드리는 산당 뿐 아니라 이방신의 우상을 두고 의식을 행하는 산당들도 생겼습니다.
산당을 처음 없앤 사람은 히스기야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72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므낫세가 다시 산당을 세워 그 전보다 더 악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산당의 문제를 우리 삶에 적용한다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산당을 지은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편리를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안전, 생활 등 땅에 속한 것들을 우선순위로 둡니다. 이런 것들이 손해를 입지 않아야 그 다음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보험입니다. 당장은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살지만 죽은 뒤의 일을 알지 못하니 작은 것을 투자해서 사후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생을 발견하고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 믿음이 산당 신앙은 아닌지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는지 살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는지 냉정하게 보시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오래된 악습에 관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 죄를 계속해서 지으면 갈수록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고 나중에는 하나님도 이런 죄는 인정하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도 깊이 박힌 못처럼 회개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이 산당을 헐게 되기까지 700년동안 그런 생각을 해본 왕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순종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룬 명령들과, 알면서도 방치하다가 내 삶에 못처럼 박혀버린 죄들입니다.
열왕기서는 모든 왕을 평가할 때마다 산당에 관한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그 뜻을 조금도 변개하지 않으시고 오늘도 우리가 더 그 명령 가운데 깊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만 복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복과 생명이 무한합니다. 아직 할 수 있을 때 더 회개하고 더 순종해서 이 복을 캐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잘 살기 위해 하나님 뜻을 고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삶을 고치게 하소서
2. 오래된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시고 두려워서 순종하지 못한 계명들을 순종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