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옮길 믿음
누가복음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본문 전의 내용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의 부탁에 주님께서 겨자씨 만큼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정말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길 수도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밭에서 돌아온 종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종은 오직 순종할 뿐이고 그것이 의무이지 그의 자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두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밭에서 돌아온 종의 마음과 자세가 곧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요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성도들이 점점 없어져 갑니다. 하나를 순종하면 열의 만족과 칭찬을 원합니다.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이 이런 마음이었다면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밭에서 이렇게 수고하고 돌아왔는데 밥상 정도는 주인이 차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인권유린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적은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순종이 있는 사람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처음 은혜 받았을 때는 그전까지 절대로 하지 않던 일을 쉽게 합니다. 은혜 받기 전에 주일에 예배를 드리라고 했으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겠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는 당연하게 주일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게 되고 그 힘들다는 술 담배도 쉽게 끊습니다.
믿지 않을 때 헌금을 하라고 하면 “역시 교회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곳이군”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자기 재물이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는 새로운 말씀 하나를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굳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본문의 종같이 일을 했다면 최소한 주인의 상에서 같이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있는 그대로 순종하고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더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뽕나무를 바다에 심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말한 대로 표현하자면 산을 옮겨 바다에 던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순종하고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의 무슬림 지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크리스천 교수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교수는 무슬림 학생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 학교에 유명한 이슬람 이맘(종교지도자)이 강연을 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원색적으로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교수가 일어나서 거기에 대하여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이맘은 그를 앞으로 불러 내어서 다짜고짜 그의 오른뺨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너는 크리스천이니 왼뺨도 대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는 묵묵히 왼뺨을 대어주고 또 맞았습니다.
그러더니 이 이맘은 그에게 “내가 지금 옷이 필요하니 네 겉옷을 벗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더운 지방이니 셔츠가 겉옷인 그곳에서 그는 그에게 셔츠를 벗어주고 내의 바람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았습니다.
놀라운 일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그의 연구실 앞에 수 많은 무슬림 학생들이 사과하기 위해 줄을 선 것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같은 상황에서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주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수가 그렇게 이유를 대지 않고 순종했을 때 무슬림 학생들도 기독교의 진실성을 보게 된 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는 반대의 경우도 보았습니다. 90년대 어느 날 찬양으로 유명한 뉴욕의 큰 미국 교회의 저녁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귀가 황홀할 만큼 훌륭한 찬양과 말씀 그리고 충만한 기도의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문 앞이 시끄러웠습니다. 무슨 일인가 보니 어떤 사람이 그 교회 사모님의 뺨을 때린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사모님이니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로 경찰을 불러서 뺨을 때린 사람을 데리고 가게 했습니다.
물론 제가 모든 사정을 아는 것이 아니니 본 대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제가 보고 느낀 것이 맞다면 그날 저와 같이 실망한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겁니다. 그리고 불신자가 있었다면 빛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도 너무나 약아 빠지고 닳고 닳은 인격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교수가 당한 일을 당한다면 당연히 그 이맘의 뺨을 때리거나 고소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래 모습입니다. 오직 계산하지 않고 말씀을 순수하게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비뚤어진 인격을 창조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 것입니다. 무조건 순종하고 순종할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참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 안에 있는 약싹 빠른 계산을 지워주소서
- 오늘도 반드시 마주칠 순종해야 할 상황에서 무조건 순종하는 믿음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