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장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모든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에 큰 손해를 입힙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5장에서 어떤 죄는 회개해도 안 되는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죄가 어떤 죄인지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의 죄가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자주 저지르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흔하다고 해서 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사야 2:22)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자가 단 한 명이고 나머지 수십억의 인구가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바꾸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잘 새겨야 합니다. 이 죄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질투하고 탐낸 마귀의 죄라는 말입니다.
유다서에서도 남을 판단하는 죄를 이렇게 경고합니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성경에서 인정하는 비방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불순종의 본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방해한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고 요한도 교회를 직접적으로 대적하거나 어렵게 한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기분이 상했거나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분풀이로 성도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지적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남을 판단하는 사단의 죄인 것입니다.
어떤 죄는 자신과 하나님만 알고 끝나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죄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셨던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빌라도 법정에서 그분을 죽이라고 외쳤던 많은 사람들이 판단력이 없는 상태에서 바리새인들이 퍼뜨린 악의적인 비방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유대인들 중에서도 악한 사람들이 조장한 군중심리에 희생된 사람들이 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면 모르겠지만 사람에게 한 번 생긴 선입견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인생이 끝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이 무분별한 비방 때문에 큰 피해를 입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 주님을 알게 된 성도가 오랜 기간 주님을 믿은 성도와 교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 성도가 누군가를 비방하기 시작하면 새로 믿은 성도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당한 일을 자기가 느끼는 대로 이야기 하는 것은 죄가 아닌 것 같지만 그 여파를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이 왜 큰 죄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싶을 때 어금니를 꽉 다물고 참아야 합니다. 요즘은 마음이 어려울 때, 예전 같으면 그 때만 참고 넘어가면 될 것을 이제는 그 잠시를 참기도 어려워진 세상입니다. 전화가 있고 메신저 앱이 있어서 별의 별 방법으로 사람을 비방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비방하는 죄를 끊어내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존심을 사랑하고 자기 소유를 사랑합니다. 신앙양심이 있어서 자기를 건드린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보복은 못하기 때문에 입으로라도 보복하는 것이 비방입니다.
두번 째 이유는 믿음에 걸맞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 죄와의 싸움이 없고 희생의 순종이 없는 사람들에게 비방은 스스로가 거룩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환각제 역할을 합니다. 내가 올라가지 못하니 남을 끌어내리는 것이지요. 세상의 경쟁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오히려 더 죄를 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힘써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죽여야 하고,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돈을 손해보더라도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배우자나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어도 입을 다물 수 있습니다.
비방하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십시오. 지난 세월에 남을 비방한 것은 예수님의 피로 씻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많은 종들은 다 다짐한 것 중의 하나가 “보고도 당하고도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아 구원의 길을 가는 성도라면 누구라도 이 다짐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유순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위로하는 말로 상처를 치유하며 소망의 말, 즉 복음을 전하여 지옥 갈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주소서
-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해롭게 하는 말을 그치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살리는 말 하게 하소서
서로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장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모든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에 큰 손해를 입힙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5장에서 어떤 죄는 회개해도 안 되는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죄가 어떤 죄인지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의 죄가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자주 저지르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흔하다고 해서 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사야 2:22)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자가 단 한 명이고 나머지 수십억의 인구가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바꾸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잘 새겨야 합니다. 이 죄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질투하고 탐낸 마귀의 죄라는 말입니다.
유다서에서도 남을 판단하는 죄를 이렇게 경고합니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성경에서 인정하는 비방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불순종의 본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방해한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고 요한도 교회를 직접적으로 대적하거나 어렵게 한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기분이 상했거나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분풀이로 성도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지적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남을 판단하는 사단의 죄인 것입니다.
어떤 죄는 자신과 하나님만 알고 끝나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죄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셨던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빌라도 법정에서 그분을 죽이라고 외쳤던 많은 사람들이 판단력이 없는 상태에서 바리새인들이 퍼뜨린 악의적인 비방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유대인들 중에서도 악한 사람들이 조장한 군중심리에 희생된 사람들이 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면 모르겠지만 사람에게 한 번 생긴 선입견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인생이 끝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이 무분별한 비방 때문에 큰 피해를 입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 주님을 알게 된 성도가 오랜 기간 주님을 믿은 성도와 교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 성도가 누군가를 비방하기 시작하면 새로 믿은 성도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당한 일을 자기가 느끼는 대로 이야기 하는 것은 죄가 아닌 것 같지만 그 여파를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이 왜 큰 죄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싶을 때 어금니를 꽉 다물고 참아야 합니다. 요즘은 마음이 어려울 때, 예전 같으면 그 때만 참고 넘어가면 될 것을 이제는 그 잠시를 참기도 어려워진 세상입니다. 전화가 있고 메신저 앱이 있어서 별의 별 방법으로 사람을 비방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비방하는 죄를 끊어내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존심을 사랑하고 자기 소유를 사랑합니다. 신앙양심이 있어서 자기를 건드린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보복은 못하기 때문에 입으로라도 보복하는 것이 비방입니다.
두번 째 이유는 믿음에 걸맞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 죄와의 싸움이 없고 희생의 순종이 없는 사람들에게 비방은 스스로가 거룩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환각제 역할을 합니다. 내가 올라가지 못하니 남을 끌어내리는 것이지요. 세상의 경쟁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오히려 더 죄를 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힘써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죽여야 하고,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돈을 손해보더라도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배우자나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어도 입을 다물 수 있습니다.
비방하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십시오. 지난 세월에 남을 비방한 것은 예수님의 피로 씻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많은 종들은 다 다짐한 것 중의 하나가 “보고도 당하고도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아 구원의 길을 가는 성도라면 누구라도 이 다짐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유순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위로하는 말로 상처를 치유하며 소망의 말, 즉 복음을 전하여 지옥 갈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주소서
-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해롭게 하는 말을 그치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살리는 말 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