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것을 좇아 살기가 어렵습니까?
미가 6장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
10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11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12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외국인이 한국에서 사는 것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외국인이 젓가락질만 제대로 하려고 해도 꽤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한국인의 정서를 배우려면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먹고 마시다시피 했던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을 더럽혀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피를 흘리셔서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영웅적인 믿음의 행위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한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선하심을 따라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8절을 “사람아” 라고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에게 선한 것을 보이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더합니다. 성경을 몰라서 선한 것을 모른다고 핑계 댈 수 없고 신앙의 연륜이 짧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범죄자가 경찰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알고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남에게 숨기고 싶어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 영적 도덕적 수준에서 주님을 따라 고쳐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선악을 구별하고 어려워도 선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선한 것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주님의 정의가 그 인격이 되어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며 약한 자의 편에 서며, 무엇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합니다.
가장 예수님 믿기 힘든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바르게 살지만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저희 어머니 친구분의 남편은 아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하신 분이었는데 유명하게 바르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이 부부가 미국에 사는 자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의 학교 근처의 횡단보도 신호는 방학이나 저녁 때는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길을 건너고 싶으면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님은 그걸 몰라서 새벽에 산책을 나왔다가 아무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는데 10분을 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버튼을 누르고 건널 때 같이 길을 건넜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의 도덕 관념이 투철합니다. 한 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습니다. 횡단보도 사건 때도 옆에서 아내 되시는 분이 아무리 그냥 건너자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그런 성격 때문에 교회는 다녀도 믿음이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겸손히 행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고, 순종하면 큰 손해가 있고, 자존심이 상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앞뒤 재지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삶의 방향을 순식간에 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평생 살면서 잘못했다는 말을 거의 해보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몇 명 있는데 저만 아니라 다른 분들 주위에도 이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랄 때,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면 매를 맞지 않을 수 있는데도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 싫어서 매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몇 대 맞고 자존심을 지켰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는 사람은 영원히 매를 맞게 됩니다.
오늘 본문 뿐 아니라 구약성경은 계속해서 공평한 추를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겸손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당시의 저울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져서 추의 무게를 따라 물건의 무게를 재었습니다. 당시의 장사치들은 추를 가지고 사람들을 속였는데, 예를 들어800그램 짜리 추를 1킬로 그램 짜리라고 속여서 200그램 만큼의 부당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이 추는 기준을 상징하는데 자기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부정한 추를 정직한 것으로 바꾸려면 많은 재물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준을 제대로 따라가려고 하면 많은 고난과 손해가 있습니다. 이것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과 겸손의 사람인 것입니다.
당시 불의한 장사꾼들은 공평한 추와 부정한 추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필요에 따라, 사람 봐 가면서 추를 골랐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나오는 부정한 추를 버리십시오. 당장은 어려워도 돌아보면 손해 본 것 없고 오히려 큰 고난을 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유를 대지 말고 순종하는 공평한 추를 심령에 담고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람과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는 삶의 기준을 주소서
-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조건 겸손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