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과 성화 –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교’ 중에서
율법을 지키는 데 체험이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결과 성화를 체험으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결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계실 때 율법을 지키신 바와 같이 율법을 높이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결은 이런 주님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결은 율법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며 항상 율법을 지키는 관점에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높임을 받은 것도 바로 이 점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성결한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들이 의와 성결이 부족되고 있음을 매우 분명히 보여주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율법의 요구를 경감시킴으로써 여러 가지를 쉽게 만들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 커녕, 만약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지 못하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되는 것은 물론 천국에 들어갈 소망조차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과야 어찌 되었건 그들은 거룩을 목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외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의가 이들의 의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즈음에서 여러분 속에 있음직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시는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주님이 다 하셨으니 우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편의 극단이요 오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는 우리가 의로운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즉 기독교인의 표지는 행위로써 나타내 보이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율법의 성결함을 보며 그의 매일의 삶에서 율법대로 살며 그에게 이 율법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일처럼 호소력 있고 마음에 드는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훨씬 능가하는 의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삶이 반드시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