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이루는 고난이라면
미가 4장 10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11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12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13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네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께 돌리리라
왜 인생에는 고난이 있을까요?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지만 고난을 기뻐하는 인생도 없을 겁니다. 심한 고난이 올 때에는 왜 그렇게 외롭고 버림 받은 것 같은지, 왜 그렇게 슬픈지 자기의 인생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은 생각에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뒤돌아보면 그저 육체의 삶만 놓고 생각하더라도 고난의 때가 있어야 성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면에 평안하고 형통한 것은 고난의 열매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그동안 쌓아 놓은 것을 소비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딸 시온에게 축복하시는 말씀입니다. 축복은 축복인데 “힘들여 낳으라” 즉 “애를 낳는 고통을 겪으라”는 축복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두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해산할 때 두 번 다 아내의 곁을 지켰습니다. 어지간한 고통은 잘 참는 아내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제는 잘해줘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해산의 고통은 보기에도 쉽지 않은 고통이었습니다.
만약 그 고통을 그저 질병 때문에 겪는다면 끔찍한 기억이겠지만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아이를 낳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겪는 고통의 열매를 알고 기대하는 마음은 고퉁의 순간을 소망을 가지고 견디게 합니다.
나라를 잃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된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절망했을 겁니다. 강대국에 나라가 망하는 것이 희귀한 일이 아니었던 시대이니 앞으로 자기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다니엘은 그곳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방인, 그것도 포로였던 그가 바벨론과 바사의 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 사드락 미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였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도 그 나라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대 포로들이 절망과 한숨에서 그 인생을 마쳤지만 이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산것이지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고난이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의 과정이라는 약속을 분명히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보이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귀환한 백성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 통곡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그들이 아무 죄 없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수백년 간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죄를 짓고 벌을 받고 회개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고난을 통해 건질 자들을 건지신다는 사실입니다. ‘딸 시온’은 이스라엘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서 영원한 그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건지실 자들을 건지셔서 그의 백성과 자녀를 삼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두려움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은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자만하다가 버림을 받았습니까? 반면에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아 그들이 손가락질 하던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람의 중심을 아시고 구원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에서 감탄과 경이의 탄성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교만하여 스스로를 높이며 즐길 그 때 그들이 선 땅은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절망하며 지난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을 구원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애통하는 자’를 누가복음에서는 ‘이제 우는 자’ 라고 말씀합니다. 설사 우리의 지난 죄의 값으로 당하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정말 그것 때문에 울고 나면 더 밝은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유독 내가 걷는 고난의 길만 다른 사람보다 더 험하고 긴 것 같아도 어둠이 깊은 만큼 동이 틀 때의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난에 스스로 결론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고난을 주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면 결론도 주님께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회복의 약속이 땅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2300여년이 걸렸습니다. 정말 그 때를 바라보고 산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처럼 그 소망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성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눈이 그 때를 바라봅시다. 한없이 후회스러운 일들이 삶에 가득해서 지금 그 쓴 열매를 먹고 있는 것 같다 할지라도, 또 어디가 이 고난의 끝인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계획하신 그 아름다운 열매 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맙시다.
주님 주신 영생의 소망이 얼마든지 오늘의 수고와 아픔을 싸매 주고 다시 우리를 일으키는 구원을 허락받은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고난에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 구원의 소망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