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불순종의 두 가지 선택 뿐이다
히브리서 3장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세상에 피아노가 몇 개나 있을까요? 최소한 수천 만대는 될 것입니다. 그 피아노들이 어떻게 음을 맞출까요? 한 피아노에 다른 피아노가 음정을 맞추고 그렇게 모든 피아노가 옆에 있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맞출까요? 그렇게 하면 중간에 조금만 오차가 있어도 피아노마다 각각 다른 소리를 내겠지요.
피아노는 세계 공인으로 정해진 음정을 기준으로 조율을 합니다. 다른 피아노 소리에 맞출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조율된 피아노는 다 똑같은 음정을 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은 이천 년 전의 사람이나 오백 년 전의 사람,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삶을 삽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한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처음 믿음을 가지도록 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은 서로 닮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되는 본질입니다. 그런데 처음 주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본질을 놓쳤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어떻게 그들이 본질을 놓쳤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닮아야 하는 대상을 주위 사람들로 정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함께 흔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계명을 주셨고 그 계명이 변한 적이 없지만 누군가 그 계명을 범하면 꾸짖는 사람보다는 전염병처럼 같은 죄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수천 명 수만 명씩 죄에 넘어지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 엎드러졌습니다. 발람의 술수에 넘어가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던 사람들 이만 사천 명이 전염병에 걸려 죽었고 하나님을 원망하던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큰 이적을 보면서 애굽에서 나온 광야 1세대들이었습니다. 특히 리더들 중에 다단과 아비람과 같은 악한 사람들이 많았고 기본적으로 목이 곧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단 사이비나,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세속적인 교회에 출석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멸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멸망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비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라” 라는 우월의식을 즐깁니다. 물질의 축복을 외치며 복음을 변질 시키는 목회자 밑에는 항상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과 사귀기 위해서 그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인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두 사람에게 맡기고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따라가다 멸망한다면 이것이 누구의 책임일까요?
아무리 어두운 시대 어두운 교회 안에도 의인은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할 때 비느하스라는 사람은 과감하게 그들 중의 한 남녀를 따라가 창으로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동족을 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 들 수 있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말씀이라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수기 25:11]
성도 간에 교제하는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아는 사람과 교제하면 하나님을 더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각자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던 습성이 아직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어서 말씀도 적당히 지키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의사를 만난다면,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 없이 해야 산다면 그 의사가 준 약 한 방울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먹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분열하는 것도 말씀 만이 해답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각자 다른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도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같이 예배 드리고 교제하는 성도가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더 하나가 되겠습니까?
기준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말씀 위에 굳게 선 성도야 말로 그 나라의 기둥입니다. 말씀은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두 가지 선택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참 성도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살게 하소서
- 다른 사람이 흔들릴 때 같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
순종과 불순종의 두 가지 선택 뿐이다
히브리서 3장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세상에 피아노가 몇 개나 있을까요? 최소한 수천 만대는 될 것입니다. 그 피아노들이 어떻게 음을 맞출까요? 한 피아노에 다른 피아노가 음정을 맞추고 그렇게 모든 피아노가 옆에 있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맞출까요? 그렇게 하면 중간에 조금만 오차가 있어도 피아노마다 각각 다른 소리를 내겠지요.
피아노는 세계 공인으로 정해진 음정을 기준으로 조율을 합니다. 다른 피아노 소리에 맞출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조율된 피아노는 다 똑같은 음정을 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은 이천 년 전의 사람이나 오백 년 전의 사람,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삶을 삽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한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처음 믿음을 가지도록 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은 서로 닮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되는 본질입니다. 그런데 처음 주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본질을 놓쳤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어떻게 그들이 본질을 놓쳤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닮아야 하는 대상을 주위 사람들로 정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함께 흔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계명을 주셨고 그 계명이 변한 적이 없지만 누군가 그 계명을 범하면 꾸짖는 사람보다는 전염병처럼 같은 죄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수천 명 수만 명씩 죄에 넘어지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 엎드러졌습니다. 발람의 술수에 넘어가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던 사람들 이만 사천 명이 전염병에 걸려 죽었고 하나님을 원망하던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큰 이적을 보면서 애굽에서 나온 광야 1세대들이었습니다. 특히 리더들 중에 다단과 아비람과 같은 악한 사람들이 많았고 기본적으로 목이 곧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단 사이비나,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세속적인 교회에 출석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멸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멸망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비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라” 라는 우월의식을 즐깁니다. 물질의 축복을 외치며 복음을 변질 시키는 목회자 밑에는 항상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과 사귀기 위해서 그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인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두 사람에게 맡기고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따라가다 멸망한다면 이것이 누구의 책임일까요?
아무리 어두운 시대 어두운 교회 안에도 의인은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할 때 비느하스라는 사람은 과감하게 그들 중의 한 남녀를 따라가 창으로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동족을 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 들 수 있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말씀이라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수기 25:11]
성도 간에 교제하는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아는 사람과 교제하면 하나님을 더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각자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던 습성이 아직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어서 말씀도 적당히 지키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의사를 만난다면,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 없이 해야 산다면 그 의사가 준 약 한 방울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먹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분열하는 것도 말씀 만이 해답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각자 다른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도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같이 예배 드리고 교제하는 성도가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더 하나가 되겠습니까?
기준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말씀 위에 굳게 선 성도야 말로 그 나라의 기둥입니다. 말씀은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두 가지 선택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참 성도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살게 하소서
- 다른 사람이 흔들릴 때 같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