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전도서 8장 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인정하기 싫지만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것이 인간의 연약한 본성입니다. 그런데 약한 자인 줄 알았는데 강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강자인데 그저 참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참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벧후 3:9)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롬1:19)이 그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을 멸시하고 마음 놓고 죄를 짓는 이유는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범하는 사람에게 바로 벌을 주신다면 세상에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벌을 두려워해서 억지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 바로 사랑에 있기 때문에 그 기쁨을 누릴 기회를 주시고자 악을 바로 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액션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반드시 이길 것을 미리 알고 보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은 악인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삶에 임해야 합니다.
믿는 분들 중에서 이런 말 하는 분들 보신 적 있습니까? “즐길 것 다 즐기고 땅에서 떵떵거리고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고 우편 강도처럼 천국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의인의 고난을 쓸데 없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악인이 잘 되는 것 같이 보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고난을 받는 것 같이 보여서 시험에 든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시험에 든 구약의 성도들은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은 잘되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고 의인의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지 않는 죄의 고민을 하는 것이 괴로운 성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죄가 괴롭지 않은 사람들은 몸에 냄새가 나는데도 자기만 모르는 사람이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더러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면 죄인들은 백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고 말씀하는데 이들은 백번 천번 악을 행하고 자기가 악을 행한지도 모르거나 알고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의인은 작은 악을 행하고도 괴로워 합니다. 의인일수록 그 괴로움은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을 흰 옷 입은 사람에 비유합니다. 그는 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작은 점 하나도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거룩한 목사님이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도움을 주었던 어떤 사람에게 오히려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도움 받은 것을 역으로 이용해 보상을 요구하던 사람의 괴롭힘은 갈수록 심해져서 나중에는 이 목사님이 설교하는 곳에까지 찾아와 소리를 지르며 예배를 방해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이 목사님은 묵묵히 그 괴로움을 참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사람의 괴롭힘은 잦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원망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감동을 받은 것은 그 소식을 들은 목사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내가 그 성도가 무엇을 원하든지 들어 주었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전혀 자기의 잘못을 알지도 못하는데 의인은 피해를 당하는 입장에서도 자기의 잘못을 찾아 회개합니다. 이것이 악인과 의인의 차이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의인과 악인의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온전한 의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점 하나 만큼이라도 더 깨끗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악인이 백가지 악을 행하면서도 큰소리 치며 살 때 의인은 작은 죄 하나에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비참한 것도 자존심 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흰 옷을 입고 빨간 국물을 먹는 느낌을 아실 겁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답답하고 지루한 삶이지만 하늘의 소망을 가진 우리에게는 한 걸음씩 하늘에 다가가는 기쁨의 삶입니다.
세상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노인이 젊음을 되찾는 것보다 송장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바로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 씻고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성도가 악인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들의 종말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돌이킬 길이 없는 멸망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의인의 고난을 동정하지 말고 오히려 부러워 해야 할 것은 그들의 마지막이 지극히 영광스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눈물과 고통이 없고 기쁨과 영광만 있는 삶으로 보상받을 고난이 얼마나 보배인지요.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많은 교회들이 세상과 동조해서 악해지는 이런 시대에 산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악인이 형통함을 부러워 하지 마십시오.
대신 의인의 고난을 부러워 하십시오.
날마다 우리가 입은 옷이 더 희어지도록 힘쓰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분께로 달려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의인의 고난을 부러워하게 하소서
-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회개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