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꼬”
사도행전 2장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는 이 베드로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스데반의 설교가 생각납니다. 같은 복음을 전했는데 한 사람은 삼천의 열매를 거뒀고 한 사람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편견이 없었습니다. 처음 보는 일에 마음이 흔들렸고 그 마음에 진리가 전해지니 자기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이미 성령님의 일하시는 것을 많이 보면서도 마음을 완악하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심이 교회로 돌아가는 것을 시기하며 질투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그 마음을 찌르니 상처에 소금을 붓는 것처럼 강하게 반발하여 그를 죽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똑같은 말씀인데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제 마음의 상태에 따라 너무 다르게 들립니다.
성령충만한 목회자, 믿음 있는 신앙의 동지가 많은 교회도 성도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찌할꼬” 라며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없어지는 만큼 그 영혼은 마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 크게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잘못을 바로 잡지 않으면 뭔가 큰 일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고 지금 자기들 앞에 있는 백이십 문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게 된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으면 모르는 것 투성이이고 그만큼 불안한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믿음의 선배들을 찾아가 물어보고 성경을 읽을 때도 더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읽습니다. 모르는 것 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믿음의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선배들이 있고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항상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만 있다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이 “어찌할꼬”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좁은 길을 가는 사람도 그 길이 좁은 만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온전히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성령님께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 결국은 어느 수준에서 그 마음이 굳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어찌할꼬”라는 탄식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시고 그 지혜가 끝이 없는데 그 사랑과 지혜를 받을 마음이 굳어져 버리니 그 영의 성장이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제 멘토이신 박보영 목사님이나 훌륭한 목사님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목회자로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목회경험이 일천하다보니 “어떻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 가진다면 그것이 바로 “어찌할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끊임 없이 여쭐 것입니다.
“주님 저 어떻게 해요?”
아마 인생의 모든 고난은 주님께 점점 이 질문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책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 없이 “어찌할꼬”를 외치는 것이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지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여쭈어 볼 수 있는 확실한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평안한 일입니까?
모쪼록 주님께 여쭙고 답을 얻고 그리고 무엇보다그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는 이 영적인 선순환을 끝까지 유지해서 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넉넉히 받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