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평강을 앗아가는 죄를 죽여라
죄는 영혼을 약하게 하는 만큼 영혼을 어둡게도 합니다. 죄는 영혼의 얼굴 위를 뒤덮는 두꺼운 구름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모든 광선을 차단하여 버립니다. 우리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에 대한 의식 전부를 앗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혼이 위로의 생각들을 더듬어 모아 보려고 시도한다 해도, 죄가 그 생각들을 다 흩어 버립니다. 그 요점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알아볼 것 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영적생활의 활력과 능력은 정말 우리의 ‘죄죽이기’ 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죽이기’는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과 능력이 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정욕의 세력 아래서 병들고 상처 입고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도들을 적용해 봅니다.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자기들을 압도하려 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거기서 건짐 받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처방을 써보아도 소용이 없고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5장 3절에서,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아” 여러 처방을 써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는(15절) 자기의 범과를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병든 것과 상처를 알 수는 있으나, 바른 처방을 쓰지 못하면 치료책들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죄 죽이기’ 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정결하게 하고, 마음 속에서 그 모든 은혜들이 자랄 여유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생명과 활력은 우리 마음에 있는 은혜라는 나무들이 자라고 번 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정황을 생각해 봅시다. 정원에 보배로운 박하를 심어 놓고 가꾸어 주지 않으면 그 옆에서 가라지들이 자랍니다. 물론 좋은 박하가 살아 남기 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처량하고 가련하고 유익하지 못한 것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자세하게 살펴야 겨우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말입니다. 때로는 잡풀들에 가려 그것을 찾기가 쉽지 않 습니다. 그러한 경우라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땅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박하가 거기 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 모양도 다른 것과 같이 가련하고 아무 쓸모없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다른 모든 잡초들을 제거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박하는 번성하고 무성해질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정원을 바라보면 대번에 그 박하들이 보이고, 필요할 때에 그것을 채취하여 필요한 데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심령에 심겨 있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죄죽이기’ 를 게을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거의 빈사 상태에 있게 되고(계 3:2), 마르고 후패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마치 게으름뱅이의 밭과도 같습니다. 게으름뱅이의 밭은 잡초가 하도 무성하여 거기에 곡식이 심겨 있는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도 믿음과 사랑과 열심을 찾으려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을 만나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설령 어떤 이가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 은혜들은 정욕 으로 말미암아 너무 소진되어 미약해 거의 힘을 낼 수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여전히 거하기는 하지 만, 거반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죽이기’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고 합시다. 정욕의 잡초를 부단하게 매일 제거하는 일을 하였다고 합시다.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 일에 힘썼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들의 성품이 마치 옥토와 같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은혜가 번성하고 활성화될 여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야 모든 은혜가 그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모든 용도와 목적에 맞게 쓰임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되지 않겠습니까!
죤 오웬의 ‘죄 죽이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