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녀이면서 또한 군사이다!
오늘의 대중은 화장품 회사들의 현대적 영업기법의 반질반질한 미사여구에 현혹되어, 태양에 몸을 노출시키지 않아도 피부를 담갈색으로 만들어주는 태닝 로션을 구입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실체의 특질은 지니지 못하고 단지 색깔만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선전하고 옹호하는 것 갈다. 그래서 영적 삶에서 훈련이나 ‘십자가를 지는 것’의 기미를 보이는 것들은 율법주의라는 낙인을 찍어 경멸하는 반면, 소위 혹자들이 ‘자유’라 칭하는 것들에는 무제한의 통행증을 발급한다.
우리는 늙은 은둔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에게 대단한 경의를 표하면서 그들의 움막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 그리고 때로 그런 신비주의자들의 영감을 받은 삶의 우물에 우리의 두레박을 던짐으로써 우리의 지쳐 빠진 영에 활력을 공급한다. 그러나 그런 영적 은둔자들이나 고행자들의 삶에 영적 훈련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한 말들을 결코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삶은 그들의 삶과 매우 다르다. 우리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게도, 우리가 이 시대를 만들어 나아가야함에도 오히려 분망하게 움직이는 이 시대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도록 허락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임을 상기시키는 모든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명과 핑계를 일삼는 이 시대의 설교들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말만 1만 번도 넘게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훈련 없이 군사들을 양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복음이 사회적,경제적 신분상승을 보장하는가?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감상적으로, 핏기 없이,고집스럽게 해석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이 ‘경제적, 사회적 신분상승 체험’을 보장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영원과 끝이 없는 위안의 세상에 있는 최상급의 보너스’ 라는 말로 복음이 제안하는 구원을 확정짓는다. 이러한 해석이야 말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제자 개념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에 대한 바울의 분명한 해석을 주목해 보라!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 이 사도인 우리를 교수형 당해야 할 흉악범 모양으로 낮은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자의 자리에 두셨으므로 우리가 우주와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 었다. 너희는 가장 현명한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고 너희는 강하지만 우리는 약 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짓밟히고 정처가 없다. 우리는 사 회의 찌꺼기요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이 되었다”(고전 4:9-11)
이러한 바울의 발언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의 마음에 들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이던 당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오늘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분노의 발끈한, 격한 반응이다.
모세에게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거의 40년 동안 호화로운 생활을 한 이후, 영구히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 명백한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 구석에 내팽개쳐지는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그리고 다음 두 가지 불변의 체험에 의해 구원 받았다. 그 하나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날에 대한 그의 생각, 즉 그가 상 주심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히 11:26) 것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 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 힘씨야 할 때이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을 낱낱이 기록한 책들이 활짝 펼쳐질 그날이 이르면, 우리가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아 비생산적으로 낭비한 시간들이 겹치고 쌓여 우리의 해명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구세주,하나님의 그리스도께서 자비의 보좌에 앉아 계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아름다운 자비의 보좌로 생 각할 뿐 아니라 아이작 왓츠의 표현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두려운 보좌”로 생각해야 한다.
이 심오하고도 영원한 진리에 대한 간략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영적 삶을 ‘승진시키기를’,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행동과 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을 견뎌낼 수 있기를, 그래서 장차 우리 모두 주님의 영광스러운 면전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기를 진정으로 기도한다.
레너드 레븐힐의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