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가 주님을 판 이유
마태복음 26장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을 찾아오시기까지 제자들의 마음은 전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라고 믿었고 잠시 가정과 생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 다니면 최강국 이스라엘의 권력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누가 더 높은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물론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인간적인 존경과 사랑도 있었고 그분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믿음도 있었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입신양명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성경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 유다가 한 일과 그가 주님과 나눈 대화들을 유난히 자세히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돈을 받고 주님을 판 후에 자살한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동기와 과정은 우리도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가 이미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넘기기로 하고 은 삼십 냥을 받은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라고 주님께 질문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속히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시자 바로 그 자리를 떠나 예수님을 넘기는 일을 합니다.
또 그가 자살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정죄 받으시는 것을 본 후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주님이 잡히시던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주님을 배신했다면 도망을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간 제자들이 해왔던 일을 생각하고 가룟유다의 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가지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보여주셨던 놀라운 이적과 능력들을 보면서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히시면 그 능력으로 그들을 굴복시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아무 일도 하시지 않고 결국 로마 총독의 손에 넘겨지게 되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것입니다.
유다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주님이 왕이 되시면 권력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왜 유다만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을까요? 성금요일 아침에 이것들을 생각해 보며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그는 돈을 좋아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돈궤를 맡아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원래 돈에 밝았고 주님을 따르면서도 돈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정말 순수하게 주님을 자랑하고 싶어서 유대인들의 손에 넘기려고 했다면 은 삼십 냥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을 찾아갔을 때 주님을 넘기면 얼마를 줄 것인지를 흥정하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자기 계획대로 되면 주님도 좋고 제자들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후 일어날 놀라운 일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모든 계획을 세우게 만든 원인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돈 사랑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악의 90퍼센트는 돈이 원인입니다. 예전에는 명목상으로라도 도덕이 더 중요한 세상이었다면 지금은 노골적으로 돈이 세상의 모든 것이 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중독자들 중에 누구도 자기가 중독자가 되기 위해 그 일을 시작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자기가 컨트롤 하던 것에 결국은 지배를 받아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의도적으로 돈을 경계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돈이 주는 세상의 쾌락이나 자랑을 사랑을 멀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 그는 주님의 말씀을 조금도 믿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물욕과 권력욕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베드로도 비참할 정도로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호기롭게 자기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주장했고 주님이 잡히실 때는 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기까지 했습니다만 결국 어린 여자아이의 말이 두려워 주님을 저주하면서 배신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간 주님께서 영생에 대해 하신 말씀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십자가 형을 언도 받기도 전에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자기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 것을 보고 미리 모든 것을 다 판단해 버리고 스스로 절망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모든 일을 자기 생각에 가두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한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말을 해도 말 한 사람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사람들이지요.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기는 들었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생각이 남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것을 진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첫째, 내가 사는 목적이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과 같은지를 보면 됩니다. 주님은 오직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그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영생에 모든 삶의 촛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그 사람은 복음을 제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둘째,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재산과 명예와 가족과 목숨보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영생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서 영생에 들어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실제로는 주님을 배신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목숨을 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들은 몰랐습니다. 이런 상태를 양심에 화인 맞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주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길을 걷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의 갈 길입니다.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가서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쓰신 그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하고 버리게 하시고 주님 뜻하신 대로 복음을 믿게 하소서
- 주님 사랑하여서 영생을 소원하고 주님 뒤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성도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