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죄보다 크다
로마서 5장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원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원죄는 사람은 아담의 지은 죄가 유전되어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전도를 할 때 사람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이 원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원죄를 이야기할 때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사람에게 사망이 들어온 것은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죄가 유전되는 것이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과 같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를 모든 사람이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각자의 죄 때문에 사망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아담의 죄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유전되어서 죄인이 되었다면 예수께서 하신 속죄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효험이 되어서 다 죄를 사함 받아 천국에 가야 이치가 맞지 않겠습니까?
아담의 죄는 믿지 않아도 유전되는데 왜 예수님의 공로는 믿어야만 구원을 받느냐는 말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죄는 그렇게 유전되고 주님의 속죄는 믿을 때만 효험이 된다면 주님의 공로가 아담의 죄만큼도 능력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속죄를 이루시기 전에도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고,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았고 사람과 대화하듯이 그분과 대화했습니다. 원죄가 이들만 피해 갔을까요?
죄는 각자의 삶에 있는 유혹입니다. 아담에게는 동산 중앙에 선악과 나무가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의 삶에 유혹이 있습니다. 율법을 몰랐다고 핑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많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육신의 고난이 들어왔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에덴 동산에서도 죄를 지은 것이 사람인데, 땅이 충분하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니 사람들의 마음은 각박해 지고 남을 밟고서라도 살려고 하니 모든 사람에게 죄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능력과 보편성보다는 십자가에서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숫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할 수 없이 적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사랑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는 사람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깨끗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크신 능력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씻는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내 죄는 좀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자기를 보면 절망스럽기만 하고, 자기 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더러움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죄의 권능을 주님의 권능보다 위에 두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자기 죄를 가지고 하나님과 변론을 해야 합니다. 변론이란 논쟁을 벌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자기의 사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고치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끔찍한 죄를 짓고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간증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범죄자들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를 지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 사람이 됩니다.
어떤 서울의 유명한 대학의 약대를 졸업하고 결혼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과 사이가 좋았지만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남편을 증오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사람을 사서 남편을 죽이고 그것을 눈치 챈 시어머니 마저 죽이려다가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배운 여자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을 만큼 악을 쓰고 난동을 부리고 자해를 해서 독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성경책을 넣어 주었는데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다가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성경을 읽었을 때 그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골치덩이 죄수들이 생기면 그 방에 넣어주면 새 사람이 되어 나왔습니다.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 죄수들까지도 그 방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변화되었습니다.
이 여성의 옛 모습은 비인격적이고 양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였는데 예수님을 만나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도 얼마든지 이렇게 바꾸실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경험들을 가지고 자기 믿음을 과신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기 죄를 주님의 은혜보다 크게 보고 절망하는 것은 주님을 더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죄보다 은혜가 더 큽니다. 절망하지 말고 은혜를 붙잡고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담의 죄가 아니라 내 죄를 회개하며 주의 공로를 힘입게 하소서
- 내 죄보다 크신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아 절망스러운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