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태복음 26장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어제 본문인 마태복음 21장에서 예루살렘에서 입성하실 때 제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데려오라고 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무엇이라도 내어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주님께서 달라고 하실 때 드릴 수 없는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께서 달라 하실 때 다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온전한 성도입니다.

정말 구원 받은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제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자동차 옵션을 고르듯이 자기가 좋은 것만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증거는 동의가 아니라 실천입니다.

자기 삶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입으로는 동의하면서 삶으로 살기는 어려울까요? 자기의 나귀를 주님께 내어드린 사람과 유월절 잡수실 자리를 내어드린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자기 삶을 드리는 믿음에 대해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나귀를 풀어올 때 나귀의 주인이 왜 그것을 데려가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주가 쓰시겠다고 하자 순순히 나귀를 내어줍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미 그들의 믿음에 대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믿음도 잘 알고 계십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달라고 하시면 내놓을 믿음인지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생각하면 교회 안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주님께서 요구하시면 전혀 내놓지 않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감동도 주시지 않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어떤 헌신의 마음도 들지 않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는다 것이고 그것은 그럴만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워낙 허상 뿐이다 보니 헌신이 없는 믿음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주인이 되는 믿음입니다. 주님 당시의 개념으로 주인이라는 말은 내가 그의 노예라는 뜻입니다.

주인은 노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목숨을 포함한 노예의 모든 것이 다 주인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그 가족까지도 다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신이 없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거듭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두번 째, 마음만큼 헌신하지 못하는 성도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가 더 헌신하지 못해서 괴로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마음에 말씀하시지만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헌신에는 벽이 존재합니다. 마음에는 원인데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목숨이라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의 헌신은 누가 등을 떠미는 것 같이 쉽지만 언젠가는 등을 떠미는 느낌은 없어지고 앞에 벽이 서있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며칠을 가지 못해서 벽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몇 년이 지난 후에 벽을 만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을 하나씩 깨나가는 것이 믿음의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벽은 물질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으며, 자기 자존심이나 꿈일 수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을 관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이런 요소들을 골고루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긍정적인 것은 성도가 이 사실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부담은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아직 주님께서 그 심령에 말씀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부정적인 것은 헌신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없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실제로 헌신한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번 째는 온전히 헌신한 성도입니다. 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이 분명하여서 주님께서 그에게 달라고 하실 때 다 내놓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들의 삶을 보십시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바울이 당한 그 고난들을 베드로도 당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렸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목숨까지 가져가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너무하신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목숨까지 드린 그 헌신이 영원한 그 나라에서 어떤 면류관이 되어있는지를 볼 수 있다면 그 불평은 부러움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꼐서 우리에게 무엇이든 달라고 하시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 믿음을 인정 받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을 마지막 호흡까지 드릴 수 있다면 영원히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주님께 드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헌신은 주님께 하는 것이지만 실생활에서 우리 헌신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 사람,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헌신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다르게 살아보십시오. 자기 배우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모습으로 섬겨 보십시오. 부모님과 자녀, 그리고 직장 동료와 하루의 삶 가운데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을 섬기듯이 섬겨 보십시오.

오른 뺨을 맞는 것 같은 모욕을 당하면 왼 뺨을 돌려대는 것 같은 인내와 겸손을 가지십시오. 속옷을 가져 갈 것처럼 얌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겉옷까지 주는 것처럼 물질도 손해 보십시오. 주린 자가 있으면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본 것처럼 먹이고 우는 자가 있으면 주님께서 우시는 것을 본 것처럼 위로하십시오.

“언젠가 헌신할 날이 오겠지” “은퇴하면 선교사로 나갈 거야” 등의 생각만 하다가 삶이 끝난 성도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는 다를 것이라는 망상이 아니라 자기는 분명히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가지십시오.

주님께서 자기 나귀를 가져가시고 자기 집의 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하게 되는 축복이 우리 모두의 삶과 소유에 부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 마음에 헌신의 소원과 결단을 주소서
  2. 항상 깨어 있어서 기회가 왔을 때 순종하고 헌신하여 축복의 기회를 잡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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