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장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정죄(심판)을 면하려면
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로마서 6장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물질적인 번영이 영적 번영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전자는 후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질적인 번영은 교계 지도자들의 눈을 쉽게 현혹해 그것을 영적 번영으로 착각하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거룩한 씨앗을 심고 기르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로마서 6장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로마서 6장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로마서 6장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나약하 고 육신적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바울은 초창기 사역 때까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로마서 5장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3 죄가
로마서 5장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나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로마서 5장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더 이상 비전도 없고 소망도 없는 가운데서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전능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비전도 없고 그래서 열정도 전망도 없을 때, 헌신에 있어서, 연구에 있어서, 읽는데 있어서, 주부의 부엌일을 하는데 있어서, 책임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복음을 선포할 때보다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의 근본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육신의 근본이 그들의 살과 피가 활동하는 영역으로 나타나도록 하여야 하고, 그들의 손길을 통해서 성육신의 근본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역자 주 – 챔버스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성육신과 각 개인에게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육신, 곧 거듭남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 간단한 한 구절로 구속과 거듭남을 성육신의 근본에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비전이 없고 활기가 없고 오직 매일 되풀이 되는 지루한 일들만 있을 때 우리는 백기를 흔들어 항복을 표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근본을 적용하는 자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꾸준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짓눌리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언제나 고정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일들이라도 결코 당신을 지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조잡하고 소심한 마음과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십시오
로마서 5장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시 87:7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자연적인 덕을 이리저리 뜯어 고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에서 전인적인 “새사람”을 만드십니다. “너희는
삼상 3:15 “사무엘이 …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하나님은 깜짝 놀랄만한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성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인가”하고 의아해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강한 손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곧 섭리를 통하여 강권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만지시는 분은 다름 아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당신은 발생하는 상황을 우연으로 봅니까? 아니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분변합니까?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 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주곡이 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마다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만드십시오. 경책은 징계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즉 경책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잊으셨나요? 누가복음 11:13절이었는지 아니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이었는지 헷갈리나요? 주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의 귀는 예리하여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을 나의 “엘리 제사장”에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이 순~종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지는 부분입니다. 나는 내게 가장 가까운 “엘리 제사장”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엘리에게 말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그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쩌면 당신의 “엘리 제사장”에게 아픔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삶의 고통을 막으려다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방치해물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오른 손을 잘라내지 않고 눈을 뽑으려 하지 않다가 당신의 생명마저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결정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조언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만일 조언을 얻으려 하면 당신은 거의 언제나 사탄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에서
로마서 4장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3 성경이 무엇을
로마서 3장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도라면 누구라도 자주 듣고 말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죄의 심판을 면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의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인 것이지요.
성도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는 이 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있는 조건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라는 말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결과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합니다.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은 율법이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이룰 수 없었던 일을 이루어 줍니다.
7장의 내용대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어떤 사람도 제대로 지키기만 하면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육신, 즉 사람의 마음과 육체가 너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냉동실에 있던 얇은 유리병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바로 깨지는 것과 같이 육신은 율법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다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양심이고 사람의 본성에도 새겨진 법이기 때문에 모세가 율법을 받기 이전에 율법을 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실 때 우리가 지은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받아야 하는 죄의 값을 치루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믿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주님 안에 숨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온전히 믿는 방법이 4절 이후에 계속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9절의 내용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서 그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으면 육신의 소욕은 방해를 받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장 17절)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는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 보십시오. 복음을 믿은 사람에게도 율법(하나님의 법)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어떤 육체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범한 죄의 값을 육체로 갚으려면 멸망 밖에는 길이 없지만 영의 생각 즉, 그리스도께서 그 육체로 내 죄의 값을 갚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 죄의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절)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꿔야 합니다. 터가 없는 집이 설 수 없듯이 먼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고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게 하는 능력입니다.
반면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예수님을 믿으니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도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면 그 죄가 씻음을 받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대로 못 산다는 말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그 때부터 자기 인생의 주인공 자리를 주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말로는 주님을 주연인 것처럼 대접해 드리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주연 그리고 주님을 가장 중요한 조연으로 대우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문제가 뭘까요? 자기의 영광이 있어야 주님의 영광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며 그 일에서 손을 떼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머쓱해 하며 쓰는 성경구절이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만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영광을, 주님의 뜻을 위해 자기의 뜻을 얼마든지 포기합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이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 안에 거해서 모든 정죄를 면하는 주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아멘 부탁드립니다. 한국 방문 관계로 앞으로 몇 주간 말씀을 보내지 못하고 그 이후로는 말씀을 읽는 분들에게만 보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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