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정죄(심판)을 면하려면
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로마서 6장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물질적인 번영이 영적 번영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전자는 후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질적인 번영은 교계 지도자들의 눈을 쉽게 현혹해 그것을 영적 번영으로 착각하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거룩한 씨앗을 심고 기르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로마서 6장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로마서 6장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로마서 6장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나약하 고 육신적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바울은 초창기 사역 때까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로마서 5장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3 죄가
로마서 5장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나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로마서 5장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더 이상 비전도 없고 소망도 없는 가운데서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전능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비전도 없고 그래서 열정도 전망도 없을 때, 헌신에 있어서, 연구에 있어서, 읽는데 있어서, 주부의 부엌일을 하는데 있어서, 책임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복음을 선포할 때보다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의 근본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육신의 근본이 그들의 살과 피가 활동하는 영역으로 나타나도록 하여야 하고, 그들의 손길을 통해서 성육신의 근본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역자 주 – 챔버스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성육신과 각 개인에게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육신, 곧 거듭남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 간단한 한 구절로 구속과 거듭남을 성육신의 근본에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비전이 없고 활기가 없고 오직 매일 되풀이 되는 지루한 일들만 있을 때 우리는 백기를 흔들어 항복을 표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근본을 적용하는 자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꾸준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짓눌리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언제나 고정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일들이라도 결코 당신을 지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조잡하고 소심한 마음과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십시오
로마서 5장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시 87:7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자연적인 덕을 이리저리 뜯어 고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에서 전인적인 “새사람”을 만드십니다. “너희는
삼상 3:15 “사무엘이 …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하나님은 깜짝 놀랄만한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성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인가”하고 의아해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강한 손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곧 섭리를 통하여 강권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만지시는 분은 다름 아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당신은 발생하는 상황을 우연으로 봅니까? 아니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분변합니까?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 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주곡이 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마다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만드십시오. 경책은 징계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즉 경책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잊으셨나요? 누가복음 11:13절이었는지 아니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이었는지 헷갈리나요? 주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의 귀는 예리하여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을 나의 “엘리 제사장”에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이 순~종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지는 부분입니다. 나는 내게 가장 가까운 “엘리 제사장”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엘리에게 말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그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쩌면 당신의 “엘리 제사장”에게 아픔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삶의 고통을 막으려다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방치해물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오른 손을 잘라내지 않고 눈을 뽑으려 하지 않다가 당신의 생명마저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결정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조언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만일 조언을 얻으려 하면 당신은 거의 언제나 사탄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에서
로마서 4장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3 성경이 무엇을
로마서 3장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로마서 6장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6 너희 자신을
물질적인 번영이 영적 번영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전자는 후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질적인 번영은 교계 지도자들의 눈을 쉽게
어느 기독 시인이 지은 비교적 긴 찬송가 가사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간단하고 짧게 말해
당신의 일상적인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헌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네”
여기서 간단하고 짧게 말한 것은 바로 ‘주를 위하여’ 이다. 이 찬송가를 오늘 날의 분주한 신자들에게 건네준다면 아마 천 명 가운데 한 명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메시지에는 참으로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적인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대는 향락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많은 자극을 받은 탓에 신격이 지쳐 있고, 취향 또한 타락했다. 인공적인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자연적인 것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신성한 것들이 세속화되었고, 거룩한 것들이 저속하게 되었어며, 예배도 유흥희 형태로 변모하고 말았다. 흐리멍덩하고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가진 이 세대는, 닳고 마비된 감각에 스릴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강력하고 새로운 흥분거리들을 계속 찾고 있다.
싫든 좋든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현실 속에서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의 위험은, 우리 주변에 사는 헷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타락한 취향과 견해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너무 많이 허용한 결과이다. 즉 앞서간 이스라엘처럼 우리 또한 그들의 방법을 배워 파멸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처럼 세속화 되어 버린 이때에 우리는 과연 이런 치명적인 영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것들을 거룩하게 하고, 삶 속에서 영적 의미를 바로 들을 수 있을까? 해답은 이미 제시되었다.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바치고 모든 일을 주의 이름으로, 또한 주를 위하여 해야 한다.
페늘롱은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께 용납 받기 위해서 따로 직업(정직한 직업이라면)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동안 자신을 위해 해 오던 모든 것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그분께서 용납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너무 단순하고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기 원하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엄청난 헌신에 자신의 삶을 던지고 싶어 한다.
보통 영적인 일들 하면, 화형대에서의 후스, 보름수 국회에서의 루터,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리빙스턴 등을 떠올린다. 우리같이 단순하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영웅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매일 똑같은 일상과 특별히 죽거나 투옥당할 아무런 위협도 없는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해답은 우리 가까이 있다. 먼저 마음의 왕좌가 있는 방을 비운 뒤 예수님을 그 왕좌에 앉으시게 하라. 관심을 집중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관심을 집중하라. 그리고 주인공이 되고 싶은 모든 바람을 버려라. 당신의 모든 것 속에서 예수님이 모든 것이 되시게 하고, 스스로가 점점 작아지도록 노력하라.
또한 삶이 오직 주의 영광만 되도록 헌신하라. 삶의 원동력이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게 하라. 매일 행하는 행동의 이유가 우리 자신도 아니고, 가족이나 나라나 교회도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이 되도록 하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모든 일에 우선권을 가지시게 하라.
이 모든 것이 너무 단순해서 당신의 눈에는 진리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성경과 체험은 그것만이 일상적인 것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주를 위하여 할 때만이 보잘것없는 작은 것들도 영원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습관적인 일상의 낮은 길이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밝고 높은 길로 변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 일상생활의 지루한 일들이 섬김이 될 것이고, 우리가 매일 하는 수많은 짜증스런 의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헌물과 희생물이 될 수 있다.
그 어떤 헌물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드려지면, 더 이상 너무 작은 헌물이 아니다. 무엇이건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은 가장 큰 헌물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는 있다. 때로는 이것이 더욱 영웅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더 큰 상급을 받을 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주를 위하여’ 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것이 마음과 입에서 진실하게만 된다면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도 할 수 있고, 저질의 금속을 황금으로 변하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A. W. Tozer의 ‘능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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