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잘 믿는 것이 소원인가
마태복음 12장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오늘 본문의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마음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주님을 메시아라고 믿기 때문에 심하게 그분을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적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이 외치는 말은 “이스라엘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본적이 없다”였습니다. 이미 표적은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병고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귀신을 쫓는 것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하는 일이라고 우겼습니다. 주님께서 메시아라는 증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비를 거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의 죄인들은 다 똑같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재앙을 내리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합니다.
이들은 우리 주위에 흔히 보는 무신론자들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기독교가 광신적이라고 조롱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우겨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알게 되자 회개 대신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을 택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완고하다고 말합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비단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이 문제에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더이상 믿음이 자라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무슨 증거를 보여줘도 안 믿으려고 하지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틀 안에서 믿음이 굳어져 말씀을 들어도 성경공부를 해도 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이 굳어져 버린 사람을 우상숭배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곤충과 짐승의 형상으로 바꾼 것이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믿고 말씀을 읽고 들어도 더 이상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런 우상숭배에 가까운 아집에 빠질까요? 바리새인들을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이 다 주님을 적대시할 때, 밤중에 주님을 찾아온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니고데모였는데 그냥 바리새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중에서도 지도자급이었고 사람들이 랍비라고 부르며 존경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자기의 위치나 사람들에게 받는 칭송이 자기를 구원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소문이 처음 들려왔을 때부터 쭉 그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이 하늘에서 오지 않다면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성도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성경을 가지고 모든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마음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안 믿기로 작정한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지금 니고데모가 앉은 자리에 앉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의 핵심을 바로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들이 잘못 살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목적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자기들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증거가 차고 넘쳐도 필사적으로 부인하고 또 부인한 것입니다.
반면에 니고데모의 인생의 목적은 진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을 쓰다보니 지금 그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진리를 찾지 못해 고민하는 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체면불구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상태를 비교해볼 때 아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간 행하신 일은 진리를 찾아 헤매는 니고데모에게 충분한 증거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어도 그들은 계속 부인했습니다. 왜요?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들을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세상의 꿈을 버리기 싫은 사람, 믿음을 자기의 자존심으로 삼은 사람들은 너무나 분명한 말씀을 듣고도 외면합니다. 자기 정도 믿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보다 열심히 하면 광신자, 자기보다 못하면 불신자 취급합니다.
어떤 한국 선교사님들이 많은 선교지에 목숨을 바쳐 헌신하는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몸을 바쳐 일하던 사역 끝에 죽을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다른 선교사님들과 현지인들이 그분을 위해 기도할 때 어떤 선교사님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의 믿음은 너무 극단적입니다. 이번 기회에 그 믿음의 끝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헌신 때문에 자기가 나태하고 열매 없는 선교사처럼 보이게 된 데서 온 질투와 분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 현지인들의 눈으로 볼 때 병상에 누운 선교사님은 진짜 선교사 그가 죽기를 바라는 선교사는 이름만 선교사였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이 분에게 있었다면
그 헌신한 선교사님은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분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껍데기를 원했지 진짜 종이 되려는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자기를 고치는 대신 헌신하는 종을 비방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믿음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봅시다. 주님 사랑해서 주님 닮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회개할 것 뿐이고 더 주님을 닮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안타까울 일 뿐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삶에 경험한 것으로 우리 삶을 드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정말 소원이냐 하는 것입니다. 소원이라면 기도할 것이고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를 이렇게 바꾸어야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합니다.”에서 “주님 뜻대로 살려는 소원을 주소서” 로 말입니다.
정말 주님을 닮아 믿음대로 사는 것이 참 소원인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소서
- 정말 믿음대로 사는 것이 소원이 되어서 진실하게 기도하여 믿음의 응답을 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