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
어제 인격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 을 다시 나누려고 합니다. 나누고자 하는 부분은 ‘거듭난 적극적 표지 일곱 번째,성품의 변화’ 입니다. 굉장히 문장이 길고 어렵지만 잘 깊이 읽고 자신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심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본성의 변화를 강하게 암시한다. 예를 들어 회심은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이 됨,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 마음을 새롭게 함,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됨,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음, 새로운 줄기에 접붙임을 받음, 심령에 신령한 씨앗이 심겨짐, 하나님의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됨 등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회심의 역사를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크고 놀라운 영속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들이 어떻게 감정적으로 고양되었든지 간에, 그들의 모든 상상과 겉치레는 헛된 것이다.
회심은, 우리가 성격의 가르침을 존중한다면, 사람을 죄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크고도 전반적인 변화다. 사람은 회심하기 전에도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회심하게 되면, 그는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과 본성 자체가 죄에서부터 돌아서서 거룩함으로 향하게 된다.
그 결과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며, 죄와 원수가 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는 처음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면서도,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 과거에 그에게서 보였던 나쁜 성질들과 악한 습관들이 두드러지거나 뚜렷하게 변화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그가 익숙해 있었던 것과 그의 본능적인 성향에 지배를 받으며, 비그리스도인과 같이 이기적이고 육욕적이며 어리석고 사악하고 향기가 없게 보인다면 이것은 그가 체험한 일들이 굉장히 영광스럽다는 이야기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매우 부정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나, 낮추는 것이나, 영광스러운 이야기나 비천한 이야기나 다 소용이 없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만 유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사람에게 잠시 동안 매우 크고 가시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가 영속적이지 않고, 그가 과거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본성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성은 영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본성을 가진 돼지는 씻어 주어도 돼지의 본성은 그대로 남는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는 비둘기가 더럽혀질 수 있지만, 그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비둘기의 본성은 그대로 남는다.
진정 본성적인 기질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회심은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는다. 회심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기질 때문에 가장 쉽게 기울어졌던 죄에 여전히 아주 쉽게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회심은 심지어 이런 죄들에 대해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비록 은혜는 악한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지만, 은혜의 강한 능력과 효과이고 악한 본성적 기질을 고칠 수는 있다.
회심 때 일어나는 변화는 전반적인 변화다. 은혜는 사람 안에 있는 죄스러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 사람을 입게 된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기질적인 죄와 다른 죄를 포함한 모든 죄는 죽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본성적 기질 때문에 특별히 음란이나, 방탕이나, 악의에 쉽게 기울어졌다면, 회심의 은혜는 이런 악한 성향들을 크게 변화시킨다.
그래서 여전히 그가 이런 죄들을 저지를 큰 위험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이 죄들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 더 이상 이 죄들이 자기 인격의 주된 요소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참된 회개로 말미암아 어떤 면에서 사람은 자신의 불법, 즉 가장 죄책이 크고 하나님을 가장 크게 모독한 죄를 특별히 싫어하게 된다. 다른 죄들은 버리지만 자기에게 있는 주된 죄, 즉 자신이 아주 쉽게 기울어지는 죄가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작은 자든 큰 자든 완전히 멸절하라는 엄명을 받고 아말렉 족속에게로 보내졌던 사울과 같다. 그는 다른 하찮은 사람들은 다 멸했지만 아말렉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왕은 살려 주었던 것이다.
성도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은혜와 선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은 정말 사실이다. 그리고 성도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은혜와 선은 모두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이 영혼의 인격적 기능들과 연합되게 하시며 본성의 원리를 따라서 그분의 영이 우리 영혼의 인격적 기능 안에 거하게 하신다. 따라서 영혼은 은혜를 받을 때, 영원한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는다.
모든 은혜의 역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은혜는 생명이 없고 여전히 죽은 상태인 어떤 것을 살리고 움직이고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그 안에 생명을 전달받아서, 생명력 있는 본성을 움직이게 하고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 중에서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참 말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의 숨은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가지게 된 우리의 영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영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으면서 더 강력한 생명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때로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본성 때문에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예전과 같이 편안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괴롭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생명으로 여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본성이 우리의 옛 본성을 이기고 생명의 빛을 나타내기를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