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한 자와 짐승
시편 49편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4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오늘의 본문을 꼭 여러 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8절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자기 재물을 가지고 자랑할 정도의 부자들도 구원의 값은 영원히 마련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값을 치르신 것이 생명을 속량하신 십자가의 값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죄 중에 가장 큰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미움에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 하나님의 원수였던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라고 말하면 바로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숨을 주셔서 당신을 섬기신 주님께서 예배의 자리, 섬김의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는 말을 들을 때 열 일을 제쳐놓고 그 자리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종처럼 우리를 섬기신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종처럼 낮추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들은 권고가 아니라 심판 받을 명령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죽어 심판대어 설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육체가 끝나는 것과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면 배우자와의 관계도 끝나고 부모자식 간의 관계도 끝나며 세상의 영광과 부도 다 끝납니다. 수십억불이 들어있는 은행계좌가 있어도 죽으면 아예 예금주가 바뀝니다.
대단한 업적을 많이 이루어도 그 사람이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역사로 바뀌고 그 사람의 이름 앞에는 죽은 사람이라는 뜻인 ‘고(故)’ 자가 들어갑니다. 수 없이 듣는 말이지만 이것이 그 삶에 적용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두 번 반복되는 말씀이 있는데 사람은 존귀하다는 것과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귀한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영혼입니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할 목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따라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의 짐승과 같은 부분은 육체입니다. 아무리 날고 뛰어봐도 그 죽음의 결과는 썩어서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육체를 기쁘게 하는 것을 좇아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짐승과 같이 여기십니다.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깨닫는다는 것은 그 깨달은 것을 실제 생활에서 적용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위해 사는 짐승과 같은 삶이 무엇인지는 오늘 본문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죽어서 가지고 가지 못할 것에 목숨을 거는 삶이 바로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세상의 사랑, 인간의 정, 명예, 학문, 예술, 재물, 쾌락 등이 가지고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 자체가 짐승의 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과 솔로몬도 최고의 예술가 들이었고 정치와 경제 학문에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사용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신앙은 이것들과 교묘하게 결탁되어 있습니다.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왜 교회의 가르침이 그렇게 변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교회도 그것들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존귀한 것을 알고 영혼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영혼을 위해 사는 존귀한 삶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십자가를 묵상할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고 그리고 안 되는 것은 회개하며 주님의 피로 씻는 것이 가장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이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열심히 땅에 씨를 뿌렸지만 싹도 트지 못하고 새에게 먹히는 길가와 같은 믿음입니다.
토저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교회를 따라했는데 지금은 교회가 세상을 따라하느라 정신이 없다.”
다른 교회보다 조금 나은 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원을 정해놓고 등수대로 들어가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한 명도 못들어갈 수도 있고 모두가 들어갈 수도 있는 절대평가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마치 50kg 밖에 들 수 없는 사람이 오래 훈련해서 100kg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작은 것이라도 순종하는 훈련을 할 때 점점 더 주님을 닮은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짐승의 삶에서 존귀한 삶으로 변화된 사람만이 성도입니다. 하늘나라는 진짜 성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지으신 영혼을 위해 살게 하소서
- 육체에 속한 것들을 가볍게 볼 수 있도록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훈련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