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천국문의 열쇠
호세아 11장 3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구원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칼빈주의가 택정설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이 구원의 역사에 사실상 사람의 역할은 없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거기에서 더 논리가 발전해 구원 받을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할 사람, 다시 말해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책망하시고 왜 그들의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부터 하나님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애굽만 나오면 모든 것이 다 자기들 뜻대로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보니 생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의 별 반항을 다 하며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의 멸망은 절대로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간 동안 수백 번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에 멸망했어도 아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왕이 있기 이전에 이미 수십 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몰라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하여 오래 참으신 것을 자신들의 얕은 꾀로 이용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을 향해 조롱도 하시고 꾸짖으시던 하나님께서 그 본심을 말씀하기 시작하시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입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랑 아닙니까? 애굽에서 건져 주시고 가나안을 정복할 때 먼저 싸워 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백성들을 오래 참고 참으셨지만 결국 자기들 꾀에 멸망한 그들을 포기하지 못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참으실 수가 있나?”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혹시 하나님은 이미 버리셨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악한 이스라엘을 놓지 못하신다는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죄를 깨달을 수록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따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용서를 받고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있다는 말이 제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한 것처럼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두신 것과 그들이 다시 회복되는데까지 이천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복되었지만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이 치루어야 했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고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잘못 간 길은 그만큼 되돌아와야 합니다. 더 악한 죄일수록 더 많은 값을 치루게 됩니다.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갔다가 걸어서 돌아오는 것 같은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를 믿고 나가면 나의 길을 잃지 않겠네” 찬송가 424(통일)장의 가사입니다. 주의 구원을 믿고 어렴풋이라도 천국을 소망하면 그만큼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믿음이 연약할수록 넘어지는 일도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구원 받았다는 증거는 이 땅을 사셨던 주님의 마음을 알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 삶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점점 주님과 가까워 질수록 고난은 많아져도 넘어지는 일은 적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사셨던 주님의 삶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한 글자로 모아질 것입니다. 왜 성도가 넘어질까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믿음은 간음한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을 끝까지 품으시는 하나님, 원수로 행하던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좁은 문 좁은 길을 찾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면 이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말하는 사랑, 하지만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 그 사랑을 삶에 녹여내어 천국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원수를 사랑하는 참 사랑으로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 같은 천국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만나는 기회마다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