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함께 떠내려가지 말라
로마서 6장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시대 교회를 무너뜨리는 큰 문제는 죄를 받아들이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술이나 마약에 중독되었다든지 도박에 빠져 산다든지 음란한 죄가 있다든지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사기를 치는 죄들은 사회도 악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자각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죄라고 느끼기 어러운 죄들입니다. 성경은 죄라고 하지만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죄가 점점 많아집니다. 그러니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죄에 대해서는 죄책감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데 사회가 교회를 끌어 잡아당겨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연애입니다. 어느 시대에도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가증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시대의 아이들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자기만 행복하다면 동성연애가 뭐가 어떠냐고 하지만 뒤로 돌아서는 구역질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인터넷을 넘어 스마트폰까지 가세한 각종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동성연애자들의 한 표도 포기할 수 없는 정치인들이 하나 되어 동성연애를 자연스러운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이 상태로 몇 십년만 지난다면 동성연애를 죄악시하던 지난 모든 세대를 미개하다고 비웃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 또한 마지막 때가 가까이 있다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그런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고 그분이 가증하다고 하신 것은 영원히 가증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성도들은 주위에서 보이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만 않으면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상한 상태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심령이 상한 사람 중에 롯이 있습니다. 롯은 의로운 삼촌 아브라함과 같이 살다다 소돔 땅에 들어갔습니다. 소돔 땅의 여러가지 조건이 너무 좋아서 그곳으로 들어갔지만 그 땅은 이미 큰 죄악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의인 아브라함과 함께 살면서 롯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 땅의 사람들과 같이 가증한 죄들을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그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의의 기준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도 의의 기준에 대해 타협하면 안 됩니다.
의는 의이고 죄는 죄입니다. 일례로 지금 시대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세상이 음란물에 잠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기독교인들도 거기에 넘어가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음행이고 음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기준만 흔들리지 않으면 회개할 길이 있습니다.
또 온 세상이 돈을 사랑합니다. 돈 때문에 친구와 친척은 물론이고 부모 자식 간에도 원수가 됩니다. 기독교인들도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어길 정도가 되면 그것은 탐심, 곧 우상숭배입니다. 이 기준이 흔들리지 않아야 중심이라도 잡고 살 수 있습니다.
저는 5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그렇게 되니 한국이 제 조국이라는 의미가 절반 이상 퇴색해 버렸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한국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의 기준이 하나씩 지워지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도 점점 희미해 집니다.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경계입니다. 세상의 것에 물들면 하나님 나라인 우리의 심령이 상하게 되고 죄를 각성하고 회개해서 하늘나라가 내 안에 충만하면 그 빛이 세상에 나타나 세상 나라가 상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의의 병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던져진 하나님의 병기입니다. 죄인 하나가 온전히 변화할 때에 그 주위가 초토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소돔 땅의 모든 죄인이 롯 하나를 죄인으로 변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롯도 그 땅의 어느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도들과 제자들은 그 삶을 통해 지역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나라를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아 성령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조건 아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함께 사는 가족조차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실체를 보고 기독교까지 비웃게 만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돈을 좋아하고 남을 미워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이 가증스럽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을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이런 삶의 모양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오늘도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또 하루를 지우시겠습니까? 아니면 죄된 삶과 세상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삶에서 돌이키고 내 삶을 의의 병기로 주께 드려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늘에 기억되는 하루를 만드시겠습니까?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은혜 중의 은혜는 우리가 결단하고 주님께 진실한 소원을 가지고 도움을 구하면, 오히려 부족하다고 고백하고 괴로워할수록 그에 맞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할 수 없다”는 마귀의 음성을 물리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여 하늘의 빛으로 세상을 침략하는 성도요 군사가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의 믿음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함께 내려가지 않도록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지키게 하소서
- 우리의 열매들을 냉정하게 평가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무능함과 믿음 없는 것을 고백하여서 정말 성도답게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