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진리를 가진 자를 위해 대언하신다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양심이 화인 맞지 않았다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자기가 천국 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이 천국을 소망하는 유일한 이유는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죄들과 자신 조차도 알지 못했던 죄들이 조목조목 드러날 때, 당황하고 부끄러운 것을 넘어 공포스러울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말씀하십니다. “저에게 그런 죄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는 십자가의 속죄를 믿었습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지옥에 갈 사람이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 사람의 영원한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은혜 중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이 하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대언하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복음에서 은혜만 받고 계명을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주사 바늘을 통해서만 주사 약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여섯 살 때 급성 간염이 걸려서 병원에서 몇 주간 입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요즘은 링거 바늘을 한 번 꽂은 후에 링거의 관만 바꾸지만 그 때는 매번 링거 바늘을 새로 꽂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혈관이 잘 나오지 않아 나중에는 이마에도 꽂게 되었는데 정말 공포스러워서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료진들이 포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바늘이 들어가지 않으면 주사약이 들어갈 수 없고 주사약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 병이 낫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게 바늘을 꽂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우는 제 이마에 바늘을 꽂지 않았겠지만 당시에 제 병이 낳을 길은 그것 뿐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 저는 이마가 아니라 더 무서운 곳에 바늘을 꽂아야 한다 하더라도 살기 위해 울지 않고 순순히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할 것입니다. 주사약이 들어와야 제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계명은 당장은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 안에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이 잠시 당하는 고난과 손해는 그저 주사바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읽어도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미국에서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WWJD라고 써있는 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WWJD는 “What would Jesus do?”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답은 성령님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삼년 반의 공생에게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탄생과 공생애 사이의 삼십 년에 관한 기록은 열두 살 때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신 것이 전부입니다.
그 한 장면을 뺀 나머지 모든 내용의 공통점은 성령님의 사역이였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신 후에 종내에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성령님께 순종하신 것이 복음서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예수께서 하셨던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예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누구라도 맞으면 반드시 병이 낫는 주사약을 맞았는데 병이 낫지 않았다면 이유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약을 맞은 것이 아니거나 그 약이 가짜이거나…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믿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이런 식의 논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다왕 여호사밧이 함께 전쟁에 나갈 때의 일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있는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가 전쟁에 나가면 적들을 굴복시키고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호사밧은 그들이 못 미더웠습니다. 그리고 다른 선지자가 없냐고 아합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한 번도 자기에게 길한 예언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그를 부릅니다. 당연하게도 미가야는 아합이 이 전쟁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지만 아합은 오히려 미가야를 가두고 전쟁에 나가 죽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미가야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수백 년 전에 주신 율법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잘 살펴본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대언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합이 율법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이해했더라면 그는 수백명의 거짓 선지자보다 미가야 한 사람의 말을 믿고 전쟁에서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의 내용과 예수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지금 주님의 삶과 다른 부분들을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진리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은 진리를 살펴보지 않고 설교자에게 자기의 영원한 삶을 다 맡기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기도하고 진리를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몸부림이 성도의 삶입니다.
진리를 주신 그대로 마음에 품고 생명의 길 걸어가서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대언을 받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깨어 기도하며 진리를 묵상하여 진리 위에 날카롭게 서있게 하소서
- 주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