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언부언
마태복음 6장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언부언이라는 말의 의미는 한 말을 또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기도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해서 한 번 한 기도는 또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근거는 누가복음 18장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장에게 가서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때까지 날마다 신원했더니 그가 들어주었다는 비유를 하시면서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응답 받을 때까지 같은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 중언부언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소원이 없는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어떤 제목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소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기도가 진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언부언의 한 가지 형태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도움을 청한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해주려면 해주고 아니면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그 부탁을 들어주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은 우리 심령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십니다. 간절하지 않은 기도를 한다거나 의무감으로 하는 기도는 무의미합니다. 중심에 소원이 비어버린 기도는 중언부언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잘못된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한 대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다 응답은 아닙니다. 소위 간증이라고 하는 것 중에 잘못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어떤 교회에서 어떤 해의 표어를 ‘모든 것이 두 배로 빨라지는 해’라고 정했습니다. 이 년 걸려야 갚을 수 있는 빛을 일 년에 갚고 일 년에 벌 수 있는 돈을 육 개월 만에 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교인 수가 오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 중에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목사님이 선포한 대로 믿고 기도했더니 이루어졌다고 간증할 겁니다.
이것이 중언부언입니다. 말을 많이 해서 그 중에 한두 가지가 이루어지거나 여러 명이 같은 기도를 해서 한두 명이 응답을 받은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요. 백발 정도 화살을 쏘고 그 중에 한두 발 명중한 것을 가지고 자기 활솜씨가 백발백중이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억울한 과부처럼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그 과부가 말도 안되는 일을 가지고 재판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말씀하신 기도의 제목들을 믿음을 가지고 응답 받을 때까지 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또 한 가지 주님의 이 말씀은 앞으로도 다시 하실 말씀인데요 그것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기도를 해야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기도란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일에 참여하여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바로 다음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데 그 내용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내일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기도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잘못된 기도를 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나누는 모든 성도님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하는 참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