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현실
시편 90편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사람의 궁극적은 두려움은 죽음에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에 둔 사람의 마음이 편할 수 없듯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그 삶에 평안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은 더 큰 두려움을 주게 됩니다.
그 크신 능력과 노여움 앞에 서야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셔서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 뒤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복음이 복음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에게 물이 귀중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 산해진미가 무용한 것처럼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은 그저 이야기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평안입니다. 평안이란 주님의 마음을 가진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이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을 앎으로 바른 길을 가는 기쁨을 가지는 것이 평안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행복은 너무나 상대적이고 환경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케냐에서는 의사라도 일 주일에 한 두번 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하위 10퍼센트의 삶을 사는 사람도 날마다 고기를 먹지만 이 둘의 삶의 만족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케냐의 의사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는 곳이 미국으로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될 겁니다. 이것이 상대적인 행복입니다.
반면에 주님 주시는 평안은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바라는 것이 이 땅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에 소망을 조금이라도 둔 사람은 땅이 흔들릴 때에 그 소망도 흔들립니다. 이것은 절대로 평안한 상태가 아닙니다.
요즘 저는 거울을 보면서 육신의 장막이 무너진다는 말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습니다. 아마 갈수록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안에 이 평안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이 오히려 소망이 됩니다.
토저 목사님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쾌락을 즐기며 살다가 육체가 쇠퇴해서 더 이상 즐기지 못하는 사람보다 추한 것은 없다.”
쾌락을 아는 사람이 더 쾌락에 목말라 합니다. 세상을 즐겨본 사람이 더 세상을 놓지 못합니다.
이것을 반대로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은혜를 알기에 더 은혜를 사모하고 하늘의 영광을 알기에 더 그 영광을 사모하는 사람이 담대하여서 세상을 이기는 참 성도입니다.
1.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심판을 두려워 하게 하소서
2. 하늘의 소망이 진짜로 땅을 이기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