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형통은 입에 쓰다
창세기 39: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 상황을 잘 살펴보면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형통’이라는 단어입니다.
39장 처음에도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그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형통한 자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 여기에도 형통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데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요셉에게 형통은 더 거리가 먼 말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형통은 모든 일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형통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가장 대접받는 자녀로 살다가 노예가 되었고 이제는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삶을 형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 하나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완전히 준비된 사람이 되어 바로 앞에 서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인격을 깎으시고 믿음을 연단하시며 지혜를 더해가시는 과정이 요셉에게는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의 인격이 깎여가고 있습니까? 채색옷을 입은 귀족의 삶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형제들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고 가장 성실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자 종 중에서 가장 존귀한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좀 편하게 살 수 있나 했더니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노예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죄수가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원망과 복수심으로 살지 않고 간수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가장 성실한 죄수가 됩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다면 노예로 팔린 보디발의 집에서 그 흙을 다 털어내었고, 감옥에서는 가장 가치있는 다이아몬드의 모습으로 깎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죄수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그는 손볼 곳이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요셉에게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은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지만 죽음에 가까이 갈때에야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평안했지만 의미없었던 시간들을 후회하게 되고 고난스러웠지만 주님께서 연단하셨던 시간들을 감사하게 됩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봅시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점점 철이 들게 된 것은 즐겁고 평화로운 시간들 때문이었습니까, 괴롭고 힘든 시간들 때문이었습니까?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처음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때 만난 선배 한 명이 제게 인간관계에 대한 잔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고 저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덕에 처음으로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25살에 미국에 와서 은혜를 받은 후에 천국과 부활에 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열심이 있는 성도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름 안심하면서도 일말의 고민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제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어떤 날은 자다가 깨서 고민을 할 정도로 영생에 관한 고민을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자다가 깨서 영생에 관해 고민하는 것과 아무 고민 없이 개운하게 자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일까요?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내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좋은 말로 하면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길 자신이 없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예상하고 있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힘들 수는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환난 중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오직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루어져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 가운데 역사하셔서 큰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도 같은 역사를 이루시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평안이나 고난이나 다 ‘멸망’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평안이나 고난이나 다 ‘형통’입니다.
이 형통의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세우고 영생으로 인도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 뜻대로 되는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되는 형통을 주소서
2. 내 뜻대로 누리는 평안이 아니라 주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을 기뻐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