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도행전 17장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 그분은 우리에게 그저 ‘알지 못하는 신’이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은 우리게게 창조주가 되셨고 예수님을 아는 순간 그분은 우리의 구원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양육주가 되셨습니다. 만약 그 나라에 갈 때까지 그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기르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길을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감사하며 사십니까? 날마나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전에 만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 상태 그대로 있습니까?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흥미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욕구에 불과했습니다. 이 지식의 욕구는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아니라 지식을 자랑하려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새로운 소식을 접해서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는 것을 즐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생명을 다해 전한 복음은 그저 잠시의 흥미거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가져야 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런 지식이 아닙니다. 목마른 사슴에게 시냇물이 생명이듯이 성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혼의 생명수와 같습니다. 알지 못하던 신이 나의 구원주가 되신 순간부터 우리는 그분이 나의 전부가 되시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처음에 믿을 때 우리는 십자가만 생각하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히지만 그 눈물이 지속되려면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를 져봐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고 더 진한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계명에 순종하고 그 행하신 일을 따라 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집니다. 이런 것만이 진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욥이 그 고난의 마지막에 하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은 욥이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순종을 통하여 눈으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될수록 성도는 겸손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욕하고 무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대신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삶에 대해 재에 앉아 회개합니다.
날마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더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높으신 주님의 말씀을 가장 겸손한 자세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드릴 참 예배입니다. 날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앞에 한 겹씩 그 베일을 벗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