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의 언약
마태복음 26장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몇 해 전까지 아무리 묵상을 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 중의 하나가 29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갈릴리 혼인 잔치 라는 기독교 다큐멘타리를 보고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혼인 풍습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과도 많이 달랐습니다. 먼저 신랑이 신부에게 청혼을 할 때 포도주가 든 잔을 건넵니다. 그리고 신부에게는 그 잔을 받아 청혼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의 청혼을 받아들여 포도주 잔을 받아 마시면 그 때 신랑이 하는 말이 바로 “내 아버지의 집에서 새것으로 당신과 함께 마시는 날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소.”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신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 신부와 함께 지낼 거처를 만듭니다. 신부는 신랑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혼인 예복을 지으며 신랑을 기다립니다. 둘 다 얼마나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까요?
그런데 혼인하는 날을 정하는 것은 신랑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그 날을 알지 못합니다. 아들이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을 마친 후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아들을 깨워 “가서 네 신부를 데려오라”고 하는 날이 바로 혼인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찬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제 아버지 집으로 가셔서 제자들을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는 혼인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 저녁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잔을 받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피를 믿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들은 주님과 정혼하여 그가 오실 때까지 정결한 신부로 준비하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피를 자기의 심령에 받아 마신 사람은 그가 오실 때까지 정절을 지키며 오직 그분을 위해서 살겠다는 서약을 한 것입니다. 신랑은 온갖 고통을 다 당하게 하고 자기는 작은 어려움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이제 곧 잡히실 주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의미는 용납과 겸손과 섬김에 있습니다.
용납이란 우리가 영혼은 주님과 함께 한다 할지라도 육신은 세상에 거하기 때문에 날마다 짓게 되는 죄들을 씻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씻는다는 것 자체가 더러운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죄라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날마다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죄를 용납해야 합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와 겸손이 있어야 남의 죄를 용납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제자들보다 더 낮은 자세를 취하신 것입니다. 상징적인 의미겠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낮은 곳도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가 담긴 잔을 마셔서 가장 악한 죄인처럼 낮아지셨습니다.
섬김은 이 겸손의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서로’ 라는 말은 상대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겸손이 절대적인 순종인데 반해 사람 사이의 겸손은 상대방보다 낮아져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할수록 점점 더 높아지는 사람을 많이 보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이 한 일은 시작부터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행한 것이 보기에는 옳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마약과 같이 그 사람의 영혼을 더 해롭게 한 것입니다.
정혼한 신랑이 떠나면 신부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예복을 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계시록 19장 7절은 이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22장14절에서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으라고 하신 것은 각자가 남을 용납해 주고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가장 낮아지려고 하며 섬기는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남에게 복종하는 것이 바로 참된 성도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주님처럼 용납하며, 점점 순종의 폭이 넓어져 가고 많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도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저 스스로 금식을 작정하거나 기도에 힘을 다하려고 하면 마음 속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힘들 것이라는 것과 피곤하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도하지 못하고 금식하지 못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이걸 이기지 못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는 얼마든지 금식합니다.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피곤한 것을 참습니다. 그런데 영혼을 위해서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현실을 주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금식하고 기도하지 못해 괴로워할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은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핑계거리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다해 금식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랑이 원하시는 것은 서로 발을 씻으며 깨어 기도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그분을 기다린 사람만 그 분이 신부를 데리러 오실 때에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깨어 기도하며 남을 섬기는 신부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용납하고, 낮아지고, 섬기며 남의 발을 씻어 예복을 준비하는 신부되게 하소서
- 마음만 가지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항상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