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않는 것만 죄다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 안에 함께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만물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낸다고도 말씀합니다. 이 것은 사람은 가만히 생각하는 것만으로, 또 하나님 지으신 세상을 보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을 애써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목적이 있고, 또 자기가 일부러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녀들이 자라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이전에 자녀들은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 부모의 가르침을 알면서 거역합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 그 사회가 분명히 금한 것들을 가르칩니다만 범죄자의 대부분은 그 교육을 제대로 마친 사람들입니다. 정말 모르고 중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때에 그들이 그 가정이나 속한 사회에서 벌을 받는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분명히 그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을 심판하시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심판이 있고 그 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면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안 믿겠다” 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이런 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한 죄들이 있는데 뻔히 그 죄들을 지으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그 안에서 계속 그 존재감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나, 뻔히 성경에 써 있는 말씀들을, “그건 율법이야, 그건 해석의 여지가 있어.” 라고 말하면서 불순종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양심은 죄를 지을 때에 아픔을 느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욕심입니다.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에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데 욕심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완전하게 마취된 손이 불속에 넣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욕심이라는 양심의 마취제는 사람을 소경과 귀머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총이 들려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남을 상하게 만듭니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욕심에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본문의 내용대로 입을 열면 거짓말이고,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말이며, 손과 발은 파멸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처해있는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도 멸망에 들어가고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 멸망으로 이끌고 갑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믿는 반쪽 짜리 신자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언젠가 우리의 혀가 맛을 보지 못할 날이 반드시 오고 우리의 눈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또 우리의 귀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구별하지 못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에릭 클랩튼이라는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기타의 신이라고 부르며 마치 죽을 때까지 기타를 칠 것처럼 기대했는데 최근에 오랜 기타연주 때문에 손에 병을 얻어 기타를 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허무한 것이 세상 일인데 그 세상의 것을 바라는 욕심은 그 욕심의 크기만큼 우리의 믿음을 갉아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쪽 짜리, 어떤 사람은 겉 껍데기 뿐인 그런 신앙인으로 살면서도 전혀 하나님 앞에 설 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날을 두려워 하며 준비하는 사람을 잘못된 믿음이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바울도 쓰임 받고 버림 받을까 두려워했고 베드로도 야고보도 심판의 날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 사랑을 몰라서 두려워 했을까요, 남들보다 수고가 부족해서 두려워 했을까요? 지옥의 공포 때문에 떠는 것만 아니라면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그 날을 두려워하면서 준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에 회개하라는 그 말이 복된 소식이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회개하라는 말이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소망할 것을 소망하며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참되고 복된 신앙생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감동받은 성도로 이 복된 끝까지 이 복된 길을 걸어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욕심이 양심을 마비시키는 일이 없도록 항상 생명의 말씀이 날카롭게 서 있게 하소서
- 마땅히 두려워 할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심판의 날을 준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