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이 죄의 진을 무너뜨린다
요한복음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하시는 말씀이 전혀 그 뜻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마르다의 마음에는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사람의 고정관념이 견고한 성처럼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사로가 살 것을 말씀하셔도 그것이 먼 미래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이 일이 과연 마르다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주님의 말씀이 주님께서 뜻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믿음이 된다면 우리는 세상을 믿음으로 뒤집어 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이런 견고한 성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왜 문명이 덜 발달된 곳에서는 맹인, 청각장애인, 손과 발이 마비된 사람들이 쉽게 치료를 받고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그런 일들을 보기가 어려울까요?
바로 세상교육과 경험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온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에서는 이것을 견고한 진,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지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를 간절히 원하는데도 어려운데 불신자들이 처음 믿음을 가지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이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헬라어는 순종과 복종을 구별해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보다는 복종이라는 말의 어감이 훨씬 더 성경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순종은 자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복종은 그 마음의 상태에 상관없이 무조건 말씀에 순종한다는 어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견고한 진이 서있는데 그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 말씀대로 행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주님 뜻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복종만이 이 마음의 진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셨던 주님은 그 누이들과 모든 사람들의 의심을 뒤로 하시고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작정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주님의 역사와 영광이 나타나려면 받는 사람의 무조건적인 순종, 즉 복종이 필요합니다. 의심하거나 계산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일생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모하기 어려운, 더구나 우리처럼 문화와 문명에 사로잡힌 사람은 더 사모하기 어려운 것이 주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여셔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믿어지고 소망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말씀하신 뜻 그대로 깨달아 믿어지고, 믿는대로 복종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 복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게 하소서
- 안 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믿음으로 싸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