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층으로 올라오세요

5월 23일 교회 사역이 처음 시작되었다. 종로 5가 로얄빌딩 12층 상가에 교회들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대부분 2,3층이지 12층에 세워지는 교회는 별로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평일에는 수만 명이 북적거리나 주일에는 한 명도 거주하지 않는 상가 지역이다.

우리 부부는 교회 주변을 살피러 나갔다. 이 곳에는 노점상을 하는 빈곤층과 점포를 가지고 웬만한 중소기업만큼 매출을 올리는 큰 부자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 창립과 동시에 우리 교회에서 중점적으로 시도한 것은 노점 상인의 아이들을 위한 무로 탁아소였다.

노점상을 하는 부모를 따라 길거리로 나온 아이들! 중구청에서 길거리 단속을 나오면 노점 상인들은 물건을 빼앗길까 봐 물건만 챙겨가지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간다.

이때 아이들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거리에 무방비로 방치된다. 그 아이들에 놀이터는 길가에 설치된 중앙선 분리대다. 그곳에 올라가고 뛰어 내리고….

그 아이들에게 안전하게 놀이할 곳이라도 마련해 주려고, 자동차 매연에 시꺼멓게 더럽혀진 얼굴이라도 씻어 주려고 무료 탁아소를 시작한 것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60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을 보육해 주지만 저녁 8시가 넘어도 부모님이 찾으러 오지 않는 아이도 더러 있었다.

교사 3명이 자원 봉사 하겠다고 왔지만 경희대, 이대 나온 교사들을 자원 봉사로 일하게 할 수 없어서 적지만 사례비를 주었다. 60명의 점심, 저녁 식사비, 간식비, 교육 교재비, 의료비, 비품비 등으로 최소한 한 달에 500만원이 넘게 들어갔다.

교회가 세워진 지 20일 만에 탁아소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열 명 정도 되는 성도들의 헌금으로는 무료 탁아소를 운영하기가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니까 우리가 이 일을 계속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는 열심히 일해 나갔다. 탁아소 아이들과 교사들의 밥과 간식, 청소, 빨래, 아이들 씻기기, 오줌, 똥 뉘는 일 등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이 내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건물 6층에 있는 목욕탕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노점 상인의 아이들처럼 내 마음에 측은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평화시장에서 큰 점포를 경영하는 부자들이었다.

그들은 밤 10시에 점포에 나와서 올빼미처럼 밤을 꼬박 새우며 장사를 한다. 긴긴 밤과 새벽을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수없이 마시는 커피가 그들을 중독시킨다.

도매업이 주춤해질 때인 아침 9시 정도에 시장 주변 어느 음식점에서 밥을 시켜 먹는다. 보통이 10년 이상이고 어떤 사람은 대를 이어 장사하기도 하니 사서 먹는 밥이 이젠 신물이 난다.

아침 10시가 넘으면 종업원에게 가게를 맡겨 놓고 목욕탕이나 이발소, 미장원에 가는 것이 그들의 일과다. 돈 버는 노예나 다름이 없다.

나와 같이 목욕을 하던 한 여자가 눌은밥에 구수한 숭늉을 먹고 싶다고 했다. 또 따뜻하게 덥혀 놓은 방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듣고 목욕탕과 내실과 엘리베이터에 이렇게 써붙혔다. “12층으로 올라오세요. 구수한 눌은밥과 숭늉을 드실 수 있어요. 12층을 누르세요. 편안히 주무실 수 있어요. 하나로교회는 당신을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60명 아이들 밥을 두 번이나 하니 누룽지가 넘쳐났다. 그 누룽지를 끓여 구수한 눌은밥과 숭늉을 만들 수 있었다. 또 된장국을 물처럼 마실 수 있게 끓여 놓았다. 그들의 잠자리로는 교회 모자실을 따끈하게 덥혀 제공해 주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만약 노점상 아이들에게 눌은밥을 먹이면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비난하겠는가? 그런데 이 부잣집 부인들은 탁아소 아이들 밥 하다가 눌은 누룽지가 최고의 음식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12층까지 올라왔다. 그들이 모자실에서 잠자는 동안 눌은밥을 만들어 놓으면 편안히 자고 일어나서 눌은밥과 숭늉을 먹고는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입소문이 꼬리를 타고 번져서 하루하루 12층으로 올라오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얼마를 내야겠냐고 물었다. 우리가 “무료예요”하면 이렇게 맛있는 것이 어찌 무료냐고 되물었다.

그들 중에는 그렇게 교회에 오가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무료 탁아소 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칭찬까지 했다. 목회자가 봉사하는 일로 칭찬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간호사가 간호했다고,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칭찬을 받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봉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탁아소 아이들 밥 하느라고 생긴 누룽지가 평화시장 부인들 눌은밥으로 다 없어지면서 무료 탁아소에 필요한 500만원이 언제나 부족함 없이 충당되는 것이었다.

분명히 탁아소도 무료였고 눌은밥도 무료였는데 말이다. 그 비밀은 노점 상인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산법에 있고, 돈 버는 것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사장 부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산법인 것 같다.

그 때의 탁아소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 전화가 오고 눌은밥을 먹던 부인들은 교회의 권사가 되어 전화가 온다. 하나님은 ‘악어와 악어새’ 같이 공존하며 살아가던 그들 모두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지금도 그들 때문에 내가 이토록 행복한 것을 보면 “12층으로 올라 오세요”라고 써 붙이던 나의 작은 손도 그들만큼 사랑하셨나보다.

유정옥 사모의 ‘울고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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