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쟁과 기근 그리고 박해
마태복음 24장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날마다 좋은 소식보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복음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굳게 묶어야 합니다.
꿀벌이 없어지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벌이라는 곤충을 그저 꿀을 만들어내고 침이 있어서 쏘이면 아프다는 정도로만 인식하지만 벌이 없으면 농산품 유제품 심지어 의류생산까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짐승도 암수가 있는 것처럼 식물에도 암수가 있는데 이 둘을 맺어주는 역할을 벌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학과 경제 발달의 영향으로 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만약 벌이 어느 이상 줄어들게 되면 식량문제가 심각해지게 되고 식량이 부족하면 전쟁이 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합니다. 사흘 굶고 남의 집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일단은 먹고 살아야 문명도 있습니다. 가장 근원적 문제는 아무리 인간이 고상해진 것 같아도 수천년 전에도 죄인이었던 인간이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은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바이러스 사태가 조금만 장기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어느 마트에서 마지막 남은 화장지팩을 놓고 세 여성이 치고 받고 싸우는 영상처럼 어디를 가나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트 다음으로 긴 줄이 늘어선 곳이 총기점이라는 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마지막 때는 굶는 것과 전쟁이 일상이 될 뿐 아니라 자연재해도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게 됩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가장 먼저 느끼게 된 것이 바로 기온의 변화입니다. 그동안 당연한 줄 알았던 자연과의 공존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면서 탄식하고 기다린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탄식할 뿐 아니라 인간을 공격합니다.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모든 면역체계가 그 바이러스를 죽이려고 공격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세계에 있는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죄를 지은 인간이 피조계에 바이러스 취급을 받아 공격당하는 것이 바로 자연재해입니다.
점점 죄가 더 깊어져 가고 이제는 나라와 민족이 힘을 합쳐 하나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을 넘고 있습니다. 당연히 더 큰 자연재해들이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등은 이미 시작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때의 초입을 넘어선 시대에 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초입을 넘어선 증거는 바로 기독교인들을 향한 사회적 미움입니다.
대한민국 코로나 사태의 양상 중의 하나는 기독교를 향해 은근히 겨누어져 있는 화살입니다. 신천지의 문제를 다루지만 신천지가 심각한 기독교 이단이라는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추수꾼’이라 불리는 교회 안에 위장 잠입한 신천지 교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자세한 관한 설명은 어느 뉴스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은근히 교회와 비슷한 단체로 몰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집단발발의 사례 중에 교회들을 집중적으로 계속해서 보도합니다.
안 그래도 목회세습과 교회들의 사회비리로 교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이번 일로 교회의 위상은 더 추락했을 겁니다. 이렇게 점점 미움을 받다가 공적인 탄압을 받게 될 때가 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 때에 성도들을 가장 힘들게 할 사람들은 바로 주님의 몸이 되지 못한 교회와 몸의 지체 되지 못한 성도들입니다. 신천지 같은 천하의 이단도 교회 취급을 받습니다. 주님과 상관 없지만 버젓히 교단에 들어가 있는 교회는 정통 중의 정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단이라고 핍박한다면 교회는 마지막 때에 세상에서 설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이정도 어려움만 가지고도 상식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체면이고 수준이고 다 버리고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더 큰 어려움 앞에서는 얼마나 더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 때에 절망하지 않고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빛은 어둠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또 태양 아래에서는 아무리 밝은 등불도 그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두워질수록 사람들은 등불 아래에 모입니다. 기근이 심하면 자기만 챙기는 것이 어둠의 일입니다. 자기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빛이 할 일입니다.
지진과 여러가지 자연재해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어둠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때 담대하게 하늘의 소망을 전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빛의 일입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을 때 같이 미워하고 보복하는 것이 어둠의 일입니다. 반면에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빛의 일입니다.
전쟁이나 기근 그리고 자신을 향한 미움과 박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보셨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어려움들을 감내하셨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환란 너머를 보는 눈입니다. 반딧불도 빛이라는 것을 어두울 때에라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도 어두울 때에 비로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 때입니다. 어두울 때 더 빛을 발하는 참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