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하나님 더 알기를 힘쓰라

민수기 11장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성도가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말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입니다. 여지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잔인하신 분이세요.”

많은 성도들이 자기들이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쉽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좀 너무하신 것 같아요.” 심지어 “하나님은 정말 얄미우세요” 라는 말까지 들어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픈 것을 아프다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수술을 받다가 마취가 잘못되어서 아프면 아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아들이 열 살 때즘 팔목에 골절상을 당해 정형외과에 갔는데 뼈에 직접 마취주사를 놓더니 그대로 접골을 합니다. 

어린 아이가 얼마나 아픈지 비명을 지릅니다. 그렇다고 의사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다른 일로 그 아이를 그의 반이라도 아프게 했다면 아빠로서 달려들어 싸웠겠지만 저는 조금도 그 의사에게 감정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완전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불신과 더불어 하나님을 향한 악한 감정이 섞인 것이 원망입니다.

제가 예전에 벽난로에 불을 붙인다고 멀리서 개솔린을 뿌리다가 통에 불이 옮겨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통을 2미터 거리에 두고 했는데도 순간적으로 불이 붙어서 불이 붙은 통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개솔린에 불이 옮겨 붙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소멸의 불을 잡아 당깁니다. 원망은 멸망입니다.

12장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일 후에 아론과 미림암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되고 미리암은 온 몸에 나병이 생겨서 진 밖에서 일주일간을 지내게 됩니다. 이백만 백성의 리더가 그런 벌을 받았으니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여기서 문제는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 태도와 그 마음에 숨은 교만이 문제입니다. 백성의 리더가 이방의 여인을 취했으니 조용히 찾아가서 그것을 지적했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애굽 땅에 돌아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수십 가지 사건을 통해 모세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세를 비방하고, 자기들도 모세 못지 않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부지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의 종을 대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가 주의 종인지, 그리고 주의 종을 대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두려워만 합니다.

먼저 누가 주의 종인지 생각해 봅시다. 진짜로 거듭난 사람은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성도의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다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함부로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아닌 것은 목사라 할지라도 찾아가서 권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교회에 세우신 법이 있으니 그 이상을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심각한 문제라도 예배 중에 일어나 목회자를 비난한다든지, 고소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치리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자기 영혼을 위험한 곳에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11장  21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시내산에서 40일간 두 번씩 도합 80일을 하나님과 독대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신명기 마지막 장은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람과 말하듯이 말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모세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 것처럼 모세도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장정만 육십만인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주시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모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압니다. 지구의 크기가 모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십배는 크다는 것, 그 지구가 우주에 비하면 먼지와 같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지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겠다고 하시면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끝이 없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생각입니다.

천국이 영원히 기쁘고 즐거운 이유는 매순간 하나님을 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한히 감추어져 있는 사랑과 선하심을 더 알아가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이 천국입니다.

하물며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나님을 자기보다 모르는 사람보다 더 알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기쁨에 목마르고 날마다 이 기대감으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원망은 멸망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소서
  2. 형제 간에 서로 대적하지 않고 죄를 보면 사랑으로 권면하게 하소서
  3.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하소서

Related Articles

순종의 딜레마

삼상 3:15 “사무엘이 …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하나님은 깜짝 놀랄만한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성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인가”하고 의아해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강한 손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곧 섭리를 통하여 강권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만지시는 분은 다름 아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당신은 발생하는 상황을 우연으로 봅니까? 아니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분변합니까?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 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주곡이 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마다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만드십시오.  경책은 징계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즉 경책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말씀하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잊으셨나요? 누가복음 11:13절이었는지 아니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이었는지 헷갈리나요? 주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의 귀는 예리하여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을 나의 “엘리 제사장”에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이 순~종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지는 부분입니다. 나는 내게 가장 가까운 “엘리 제사장”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엘리에게 말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그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쩌면 당신의 “엘리 제사장”에게 아픔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삶의 고통을 막으려다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방치해물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오른 손을 잘라내지 않고 눈을 뽑으려 하지 않다가 당신의 생명마저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결정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조언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만일 조언을 얻으려 하면 당신은 거의 언제나 사탄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에서

끝없이 지루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더 이상 비전도 없고 소망도 없는 가운데서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전능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비전도 없고 그래서 열정도 전망도 없을 때, 헌신에 있어서, 연구에 있어서, 읽는데 있어서, 주부의 부엌일을 하는데 있어서, 책임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는, 복음을 선포할 때보다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의 근본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육신의 근본이 그들의 살과 피가 활동하는 영역으로 나타나도록 하여야 하고, 그들의 손길을 통해서 성육신의 근본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역자 주 – 챔버스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성육신과 각 개인에게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육신, 곧 거듭남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 간단한 한 구절로 구속과 거듭남을 성육신의 근본에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비전이 없고 활기가 없고 오직 매일 되풀이 되는 지루한 일들만 있을 때 우리는 백기를 흔들어 항복을 표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근본을 적용하는 자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꾸준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짓눌리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언제나 고정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일들이라도 결코 당신을 지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조잡하고 소심한 마음과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십시오

서로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장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성경의 인물들 (19) 모세 2

민수기 12장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46) 반역, 동조, 회개

민수기 16장  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