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어느새 지팡이를 의지하는 모세와 같이 되지 말자

19장 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하나님께서 부정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는 이유는 정결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죄에 대해서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당신 불치병이나 걸리면 좋겠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가 이것 저것 다 검사해 보고 환자에게 “ㅇㅇ 병입니다. 최대 6개월 정도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진단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정한 사람을 부정하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신 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정죄의 다른 말은 심판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지옥의 판결을 내리는 것이 심판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외치는 것이지요. 남의 믿음을 판단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은 더욱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죄라고 가르쳐 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죄라고 인정만 하고 주님 앞에 나가면 살 길이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러는 사람은 더 미련한 것이구요.

20장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지팡이를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팡이는 처음 호렙산 떨기 나무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기도 했고, 홍해를 가를 때도 그 지팡이를 앞으로 내 뻗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할 때도 그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에게 이번에는 반석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팡이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반석에게 명령하는 대신 지팡이로 반석을 칩니다. 그동안 지팡이로 무엇을 할지 알려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팡이 자체에 의미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에 불과한 사역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의지한다든지 십자가의 형상에 특별한 의미를 둘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남미 교회들은 십자가도 우상으로 대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특성상 너무 형상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모양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특정한 목사님들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순종하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존경하고 가까이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순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지팡이를 의지한 모세의 실수가 우리에게 있는지 돌아보고 제자리로 돌이킵시다.

21장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이라도 먹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만나일 것입니다. 맛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음식을 먹어보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평합니다. 호의가 길어지면 권리가 된다는 말처럼 은혜가 계속되니 이제는 하찮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만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날마다 먹을 수 있는 하늘의 양식인데 어느새 많은 성도들에게는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성도에게 하늘의 소망을 이야기하면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고, 죄에 빠진 성도나 세상에게 죄를 죄라고 가르쳐 주고 회개하라고 하면 사랑 없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광야의 만나보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권위를 주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방자한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들어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1.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로 씻게 하소서
  2. 지팡이가 아니라 지팡이를 들라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3.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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