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를 사모하라
로마서 8장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또 무엇을 목적으로 사람들을 부르셨는지를 짧지만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정하셨습니다. 미리 아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미리 아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사람들을 정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부르셨는지입니다. 본문은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형상은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어의 뜻은 그 대상의 성품, 도덕성, 그리고 실제 행위 등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그 아들의 성품을 닮아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주님과 니고데모가 나눈 대화를 보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보시는 것을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한복음 3:11-12)
많은 대한민국 남성들에게는 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군대입니다.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평생 그 이야기만 나오면 뻔히 들었던 사람 앞에서도 한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듣는 사람이 전혀 자기 말에 공감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주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아신다는 것이겠지요. 분명히 신자라고 하는 우리도 주님께서 전하신 하늘의 소식을 전적으로 다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라고 하면 그것이 축복으로 들리지 않고 고생하라는 말로만 들리는 이유가 뭘까요? 뭐라고 변명해도 그것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좀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예전에는 사법고시를 패스하면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습니다. 2년 가량을 잠을 못 자고 공부하며 시험보고 성적을 매기며 경쟁하는 생활은 수험생 때보다 더 고생스럽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족들도 기뻐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 뒤에 있을 일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의 고난도, 믿는다면,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 그분처럼 사는 것은 분명히 고생입니다. 그러나 정말 영생을 믿는다면 왜 그것이 그저 고생이기만 하겠습니까? 왜 내가 지금 보는 손해가 정말 손해처럼 느껴지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주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라면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영화롭게 하시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 영화롭게 하심은 궁극적으로 주님과 같이 살다가 주님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말하는 영화와는 정 반대로 살게 됩니다.
얼마 전에 케냐의 이원철 선교사님이 전기톱을 사용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오늘 도시의 병원에 가신다고 해서 연락을 드렸고 그 상처를 사진으로 보았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하게 보였습니다.
고통도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고 의료기술이 낙후된 곳이다 보니, 한국 같았으면 재건 수술과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을 상처를 오늘 만난 의사는 그냥 잘 아물게 소염제 먹으면서 소독이나 잘 하라고 처방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혀를 차고 안타까워 할 일이지만 주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바로 그 선교사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은혜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 영화롭게 보이고 진심으로 부러워하게 되는 것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닮기를 진정으로 소망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소망대로 주님의 성품을 닮고 삶을 닮는 믿음의 진보를 허락해주소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